<이청준 평전> 서평
수능장에서 본 국어 지문이 너무 슬퍼 시험을 망쳐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능은 아니지만, 나 역시 모의고사를 보던 도중 '제시문'이 '작품'이 되는 경험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이나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었을 때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강렬하고, 말 그대로 작품에 압도되었던 경험은 이청준의 <줄>을 읽었을 때다. 독특한 액자식 구조와 '초월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줄광대 이야기,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인물 관계 설정까지. <줄>을 읽은 후의 나에게 모의고사 문제는 이미 뒷전이었다. 작가의 이름이 이청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시험이 어서 끝나서 <줄>을 전부 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대로 이청준에게 매혹된 나는 이후로도 <당신들의 천국>이나 <병신과 머저리> 같은 작품들을 찾아 읽고는 했다.
아마 이청준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라면 나와 같은 경로를 밟았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줄>이 아니더라도 <당신들의 천국>이나 <병신과 머저리> 같은 작품들은 교과서에 한 번은 수록되는 작품들이며, 세계는 냉혹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이청준의 문장들은 어린 나이의 학생이라도 한 번은 매혹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 이청준이 아닌 사람 이청준에 관한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때때로 백석은 잘생긴 영어 선생님이었고, 이상은 다방을 운영한 적이 있으며, 박태원은 봉준호의 외할아버지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선생님의 사담(私談)이 수업 내용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을 기억하면 꽤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2023년에야 발간된 <이청준 평전>은 언젠가 우리를 매혹시켰지만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작가의 삶을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평전'이라는 장르가 해내야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책 속의 내용은 내가 생각한 '사담'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청준 평전>의 대부분은, 그러니까 이청준의 삶 대부분은 가난과의 싸움이었고, 관념적이고 초월적이라 생각했던 그의 소설은 가난으로부터 태어난 증오와 '복수'라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이청준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청준의 아버지는 가진 것 한 푼 없이 장흥으로 와서 하인을 둘 정도로 가세를 키운 자수성가의 전형이었고, 군에서 수재로 불리던 이청준의 큰형은 레코드판을 구해와서 최신식 노래를 틀어주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상당한 양의 '독후감'을 남기는 독서광이었다. 하지만 이청준이 아버지의 재산과 큰형의 예술적 취미를 바탕으로 예술적인 감수성을 막 키워갈 여섯 살 무렵, 그의 큰형과 아버지가 연이어 사망한다. 시간이 흘러 이후 6.25가 발생하고 이청준의 작은형이 징병회피를 위한 뇌물을 쓰기 시작하며 하나 둘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하였고 끝내는 파산 하며 집을 팔고 만다.
이청준은 가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때 중학생이었으며 집이 완전히 파산할 때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니 당대 호남에서 명문학교로 불리던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일고에 진학한 이청준이었지만, 집으로부터는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청준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게잡이 사건'이다. 이청준의 어머니는 홀로 광주로 가는 이청준을 친척집에 묵도록 했지만, 차마 빈손으로 아들을 보낼 수 없어 이청준과 함께 바닷가로 나가 잡은 게를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이청준이 친척에게 도착하여 게를 선물로 줄 때는 이미 게가 다 죽어 바스러지고, 부패하여 퀴퀴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친척은 이청준이 보는 앞에서 게를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이는 이청준이 평생 동안 기억한 '모욕'이 된다. 가난과 부, 시골과 도시, 자신이 겪은 속세의 모욕과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이상향. 이청준은 이러한 분열을 오랫동안 내부에서 때로는 담금질하고, 때로는 삭히며, 자신이 글을 쓰는 원동력으로 발전시킨다.
이청준은 육성으로 직접 말한다. 자신의 창작 동기는 모욕이며, 그 목적은 복수라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세상에 복수할 수 없었던 그에게 복수란 문학을 통한 정신세계에서의 전복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전복은 여러 가지 양태로 표현되는데, 평전에서는 이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 먼저 첫째는 세상사에 달관하며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태도이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지주로 몰려 온 가족이 학살당한 후,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산속에서 당나귀와 함께 살아간 친척 어른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두 번째는 사회 속에서 모욕을 감내하면서 초라해 보이지만 자신에게는 진실한 길을 찾는 것이다. 이는 혼란스러운 전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클래식 피아노 연주에 열성을 다한 음악교사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화이다. 말년의 이청준은 신화를 통해 정신과 현실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의 양태를 응집시키는 핵은 언제나 예술을 통한 자기 구원이었다. '자기 구원'은 언뜻 거창하고 숭고한 동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청준에게 자기 구원은 복수라는 인간적인 감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청준은 집이 파산한 고등학교 시절, 호남 제일 부자인 현준호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클래식과 교양이 넘쳐흐르는 그 집에서 이청준은 현준호의 장녀인 현영민을 만난다. 그녀는 이청준이 꿈꿨던 여성상, 교양 있고 지적이며 세련된 도시 여자였다. 이청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녀와 대비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추도 깊어진다. 이청준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 말 그대로 '잠잘 집'이 없어 대학교 강의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지만, 그 와중에도 이화여대에 다니는 현영민을 보기 위해 신촌으로 향했었다. 하지만 이청준이 몇 년을 품었던 사랑은 현영민에게는 어린아이의 장난쯤으로 치부되었고, 그 후 이청준은 현준호 가와 연을 끊으며 또다시 홀로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온다. 평전은 이청준과 현영민의 관계를 꽤나 긴 분량으로 다루며, 이청준이 자신의 단편 곳곳에 현영민을 암시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또 소설에서 '나'는 언제나 현영민 같은 여자에게 사랑받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처럼 이청준의 문학은 그 출발점이 글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려는 것도, 혹은 문학 형식과 기교의 측면에서 새로운 혁신을 가져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에게 문학은 '자기 구원'이었다.
이후 평전은 대학 졸업 후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청준의 삶을 몇몇 작품을 소개하고 그 배경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 부분이 <이청준 평전>이 지닌 사소한 아쉬움이었다. 유년기와 대학시절까지의 설명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실제로 그가 작가로 활동한 기간은 다소 설명이 미흡하다고 느껴졌다. 이 지점은 <이청준 평론>을 쓴 이윤옥 교수가 이청준의 팬이자 동료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평전은 제삼자가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통해 인물이 겪은 사건이 인물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윤옥 교수는 이 지점에서 관찰자인 동시에 관찰 대상이 된다. 평전 곳곳에는 이청준과 이윤옥 교수가 겪은 일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설명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때 독자인 나로서는 그것을 평전의 본문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평전에 인용된 인터뷰로 보아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청준이라는 사람이 워낙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았기에 친분을 가진 이윤옥 교수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청준 평전>은 그 하나로서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청준의 삶이 워낙 고단하기도 하였지만, 알려진 인물의 비사(秘史)를 보기 위해 장막을 걷어내는 평전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문학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