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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Mar 14. 2021

영화 비평은 왜 필요한가.

침착맨의 영화 평론 리뷰 영상에 대하여.

 유튜버 '침착맨'의 채널에서 '신과 함께' 시리즈에 대한 왓챠 코멘트를 리뷰하는 영상이 삭제되었다. '신과 함께'에 대한 코멘트를 남긴 사용자들의 닉네임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공개되었고, 시청자들이 채팅을 통해 그들을 향해 선을 넘는 조롱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침착맨의 영상 삭제 공지 게시물의 댓글창을 보면, 영상 삭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보다는 "빨리 보길 잘했다"는 댓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얕게는 침착맨 방송에서의 시청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넓게는 작품과 비평에 대하여 말이다.

 

 현대는 비평의 시대라고 말해도 손상없다.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 문화 영역의 파급력이 높은 시대며, 기술의 발달에 따라 소비자가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서서 집단 여론으로 창작자를 압박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의 대중화의 결과, 영화 평론에 대한 신뢰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평론가들의 자기도취적인 글들이 가장 큰 반감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덧붙여 수많은 '아마추어 평론가'들의 등장은 평론의 해체를 가져온 직격타가 되었다. 한 쪽에서는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간단한 리뷰나 분석, 줄거리 요약 등을 업로드 하는 유튜버들이 생겨났고, 다른 한 쪽에서는 평론가들의 현학적인 문체를 따라하며 대중들과 '구별짓기' 위해서 글을 쓰는 '왓챠러'가 등장한 것이다. 평론 자체가 흔해지고, 평론 없이 리뷰만으로도 자신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제 영화에 관해 '평론'을 쓴다고 할 때 우리는 '혼자 고고한 척 한다'는 냉소를 견뎌야 한다. 아마 침착맨 시청들의 선 넘는 조롱이나 모욕은 '왓챠러' 부류에 해당하는 아마추어 평론가들을 향한 냉소가 익명과 집단성이라는 이름 아래 극단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예시일 것이다. 


 물론, 조롱의 대상이 된 평론들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에 있다. 나 또한 왓챠에서 코멘트 읽기를 멈춘 사람이다. 때때로 그들의 가식과 허영을 견디기 힘들고, 도대체 이 사람이 영화를 보고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일지 의심이 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이 곧 그들을 모욕해도 된다거나, 더 나아가 영화 비평 자체에 대한 냉소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침착맨의 영상에서 시청자들은 일부 비판의 소지가 충분한 코멘트들 뿐만 아니라 충분히 경철할 소지가 있는 영화 평론가의 코멘트에도 동일한 강도의 분노를 드러내었기에, 나는 이 지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내용은 자연스럽게 영화 평론의 필요와 영화 평론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 된다. 


 먼저, 영화 평론은 왜 필요한가? 이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영화 평론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성일 평론가의 '기생충' 평론의 첫 문장을 보고 뒷통수를 후두려 맞는 기분을 느꼈다. "종수는 기우를 만난 적이 있을까"로 시작하는 정성일의 평론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의 주인공 종수와 '기생충'의 주인공 기우와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봉준호 감독이 다룬 시대상과 봉준호 감독이 가진 작가성을 비교하는 내용의 글을 썻다. 이 글은 '기생충'에 대해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던 나의 마음을 뚫어주는 글이었고, 영화를 가지고 사유를 이어나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글이었다. 그런 점에서 '좋은 평론'은 우리에게 하나의 별개의 작품으로서 감동을 줄 때가 있다. 즉, 작가가 심어놓은 상징을 완벽히 해석하는 경우와,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파악함으로써 창조적으로 담론을 이끌어가는 담론 모두 '좋은'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로는, 평론을 비판하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같은 인물인 정성일 평론가를 예시로 들자면, 정성일 평론가와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몇 시간 동안 나눈 인터뷰가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자신이 아는 인문학적 개념과 영화사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영화의 장면장면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박찬욱 감독의 답변은 '그런 의도였다기 보다는~'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독자인 나 역시 그의 주장의 근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첫번째 주장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평론은 가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를 평론하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몇 가지 효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정성일 평론가와 박찬욱 감독의 대담을 읽고 있으면, 감독은 생각보다 세상 만사를 통달하여 상징과 비유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퍼즐 제공자'가 아니며, 평론가의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은 때때로 진실과 너무나 동 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화를 "감독이 만든 (혹은, "평론가가 해석한)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완성품", "해석되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재미있는 방법으로, 흥미롭게 만든 작품"이라는 겸허한 전제 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겸허한 인식의 바탕이 있어야만, 진정으로 한 예술가에게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평론을 읽는다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평론이 만든 허영이 문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이 주장은 언뜻 첫번째 주장과 두번째 주장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문화를 향유하는데 있어서 '지적 허영', 혹은 '과시'는 당연한 절차이다. 이러한 과도한 허영심과 과시의 단계는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되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허영과 과시는 개인이 영화라는 분야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무언가에 대해서 아주 조금 알 때 가장 자신감 있게 말하고,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할수록 말을 조심하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몇 평론은 영화에 대한 허영과 과시를 부추기고, 그러한 원동력들이 깊은 내면의 성찰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영화 산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소비자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왓차려'들 중 대다수는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안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약간의 변명은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다. 그림을 누구보다 못 그렸고, 미술 선생님이 '그림을 못 그린다'고 대놓고 말했던 것이 너무 큰 상처로 남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아직도 사람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림을 못 그리는 단계는 누구나 겪는 단계이며, 그 단계의 기간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시절 미술 선생님이 나에게 조금만 상냥했더라도,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그림을 패러디해서 조잡하게 완성한 작품에 아주 작은 칭찬만 해주었더라도, 내가 그림 그리기를 완전히 포기했을까. 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위의 나의 주장들을 정리하자면, 평론은 그 자체로 작품일 때가 있으며, 좋지 않은 평론은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평론이라는 '상황'은 영화 업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여준다. 또한, 평론은 그 분야에 대한 허영과 과시를 심어줌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산업을 '질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왓챠러'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분노도 일부분 이해가 가지만, 평론이나 평론 행위 자체를 뭉뚱그리고 싸잡아 조롱하는 문화는 영화 산업 전체의 측면에서 볼 때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양이나 전문성이라는 단어가 '가오', '우욱씹'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는 순간. 문화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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