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를 다시 읽었다. 고등학교 시절 필독도서였기에 읽었던 때와는 달리, 조금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작품의 촘촘한 세계관과 교차 편집을 연상시키는 문단 배치, 정확한 순간에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문구와 적나라하지만 심도 있게 그려지는 미래 사회의 모습. 다시 읽어도 느껴지는 재미와 감동이 있었기에 <멋진 신세계>가 고전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였던 곳도 있었는데,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멋진 신세계>를 읽었을 당시에는 신세계, 그러니까 문명세계를 악으로, 야만인과 야만인 보호 구역을 선으로 상정한 후 읽었었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을수록, 나는 인물들을 공통적으로 묶고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인간을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파멸의 글로 이끄는 바로 그 운명 말이다. 이 운명은 인물들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본질을 드러내기에, 먼저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양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 초반에 세계에 모순을 느끼는 인물로 등장한 버나드 마르크스는 시간이 갈수록 그저 또 다른 속물적인 인간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문명 세계의 어트랙션이 된 야만인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가진 권력을 즐긴다. 즉,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나의 기억 속과는 달리 세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선구자가 아니었다. 그가 문명 세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외모와 능력이 세계의 기준에 미달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알파'인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게 키가 작고 왜소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버나드는 사회적 상징을 획득한 순간부터 더 이상 세계에 저항하지 않는다. 나에게 버나드라는 인물이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러한 인물에 대해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의 메시지를 반박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메시지를 사회적인 것이 아닌 메신저 개인의 결핍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타인의 진심을 가장 저속하게 왜곡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세계에는 분명 개인적 결핍을 사회적 비판으로 위장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는 그러한 인간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나는 그 이유는 작품 속에서 왜 사회가 결국은 '멋진 신세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버나드는 작품 초반에서는 고통을 스스로 느끼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환각제인 '소마'의 복용을 거부하지만, 야만인을 통해 권위를 얻고 난 후에는 거리낌 없이 소마를 복용한다. 버나드에게 진정한 소마란, 물질이 아니라 상징이었던 것이다. 혁명을 진압하는 것은 무자비한 탄압이 아니다. 철저한 인간의 상징화. 그것이야말로 혁명을 죽이는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혁명이 없을 때 사회는 '안정'된다. '멋진 신세계'는 결핍을 기계공정을 통해 조절하거나 계층별로 차등을 주며 부여함으로써, 또 결핍 자체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나는 버나드는 왜 '멋진 신세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본성의 한 부분을 의인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운명의 한 부분인 것이다.
두 번째로 레니나를 살펴보자. 레니나는 멋진 신세계 속에서 별 탈 없이 살아가는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한 사람에게 깊게 끌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초반에는 버나드 마르크스에게 특별한 관심을 느끼고, 후반에는 야만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 인간의 배타성과 질투가 얼마나 안정에 위협이 되는지 알고 있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레니나의 특징은 사회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배타성과 항구성을 복구하는 혁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운명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멋진 신세계의 생산 과정에 의해 생산되었다. 그녀는 버나드나 야만인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여타의 남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버나드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끊임없이 (멋진 신세계의 통념에 따라)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야만인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자며 프러포즈를 하는 것을 격렬히 거부한다. 즉,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자각할 인식 체계가 마비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잘못이 아니며, 그녀가 타고난 성질이고, 운명이다.
마지막으로 야만인까지 살펴보면,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의 새로운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 야만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외워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전통적 가치를 추구 하는 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책의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결국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무리한다. 왜 그런가? 야만인이 변화를 가져다오기에는 멋진 신세계가 너무 정교하다는 말은 진실의 반쪽이다. 새롭게 작품을 읽을수록, 야만인을 죽음으로 이끈 내부의 운명이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혼혈아이다. 그가 혼혈아라는 점은 그가 야만과 문명의 세계 중 어느 한 곳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점을 은유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야만 사회에서도 무리에서 배척을 당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글을 읽기 시작했다. 즉, 그는 순수하게 야만인 상태가 아니라 항상 그 중간에 위치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야만 사회가 순수의 존재로서 문명과 대비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곳은 문명과는 다른 상징이 존재하는 곳이며, 외관은 다를지 몰라도 내부는 문명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야만 세계는 토속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혼합된 멕시코 지방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던 종교의식 장면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 여행을 왔다가 실종된 문명세계 사람이었기에, 야만인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평소에 해온 것처럼) 다른 남자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고 성장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이 겹치며, 그는 마치 독실한 기독교 신자처럼, 원죄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자기 속죄와 여성에 대한 경외와 질투를 동시에 느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어쩌면, 그가 셰익스피어를 읽은 것은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이야 말로 야만인의 운명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야만인은 본인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거부하는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레니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그녀를 창녀라 부르고 쫓아낸다. 야만인은 레니나를 쫓아낸 후, 임종 직전의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자신의 정부였던 또 다른 야만인의 이름을 되뇌기만 하는데, 여기서 야만인이 느끼는 질투와 여성에 대한 경멸의 감정은 어린 시절 그의 세계관을 결정지었던 바로 그 운명이 다시 현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SF적 세계관을 촘촘히 구성하였고, 독특한 이야기 구성으로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 불릴만하다. 하지만 그 내부의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셰익스피어의 어느 비극과 다르지 않았다. 인물들은 결핍을 가지고, 결핍을 주관하는 사회에 도전하지만, 그 자신의 어리석음과 운명으로 인해 끝내 파멸하고 만다. 그러니 나는 '멋진 신세계'는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5의 비극'이 아닐까? 만약 셰익스피어가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멋진 신세계의 작가는 올더스 헉슬리가 아니라 윌리엄 셰익스피어였을지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TMI) 개인적으로 '멋진 신세계'란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단어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인용되었다는 점과, 극 중 야만인이 처음 미래 사회를 접하고 내뱉었다는 점, 그리고 중세 영어로 brave가 탁월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나는 '황홀한 신세계'가 왠지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