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반게리온>
흔히 '홍대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이 특정 예술 작품이나 예술인을 잘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만 알고 싶은 작은 예술가를 빼앗아갔다는 박탈감과 그 작품의 이면에 있는 의미를 모르면서 작품을 잘 아는 척하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 이상한 자부심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게 얼마나 추한 행동인지 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이 글은 차라리 후자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TV에 <1984>가 인용되며 공산주의 사회의 참상을 고발하는 영상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리액션으로 잡히는 출연진의 심각한 표정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신체/신경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척추 반사 수준이다. 나는 <1984>는 단순히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비판하는 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1984>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추구하는 과정을 다룬 종교적 작품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1984>는 <멋진 신세계>보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그 근거들이다.
<1984>의 기법 중 특이한 점은 작품 내에서 사용되는 '신어(新語)'를 부록의 형식으로 책의 맨 뒷부분에 첨가한 것이다. 그 부분을 읽어보면 중 신어의 특징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good’의 반대말이 ‘bad’가 아니라 ‘ungood’으로 되어 있는 점이 있다. 이것의 형태를 잘 살펴보면, 부정의 의미(나쁘다)가 독자적으로 형태(Bad)를 가지지 못하고 긍정에 예속되고 있음('un'-good)을 볼 수 있다. 왜 당은 부정에게 독자적인 형태를 부여해주지 않는가? 나는 그 이유가 부정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이것은 의자야.’라는 긍정문을 살펴보면, 긍정문은 대상(앞에 있는 의자)과 개념(언어적 의미의 의자)의 일치 여부만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정문은 다르다. ‘이것은 의자가 아니야.’라는 문장은 '대상과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우선적으로 가진다. 하지만 그 후에 '대상과 일치시킬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는 추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지점이 부정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부정의 추가적인 질문인 '또 다른 개념'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자가 아닌 저것'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말들을 선택하고, 취소한 후, 결국은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은유하는 것은 어떠한 공리나 명제에 반대하는 자들이 가지는 자유이다.
이러한 표현은 표현 자체로도 재밌지만, 당의 이러한 편집증적인 행위를 통해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고, 고조된 긴장감은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 윈스턴을 고문하는 오블라이언의 대사에서 절정에 달한다. 당을 배신한 행위로 고문을 받는 윈스턴은 그냥 자신을 죽이는 편이 더 간단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당이 옳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설득시키지 못해 안달이냐고 오블라이언에게 묻는다. 오블라이언의 답은 간단하다. "당은 완전" 해야 하는 것이다. 완전함에 대한 추구. 그것만큼 인간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질문이 있을까? 나에게 <1984>는 이 지점부터 SF 소설이나 사회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 서적처럼 다가왔다. (오블라이언의 "불완전한 인간이 당을 통해 완전해진다"는 말과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겐도의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인류보완계획'이다"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어쩌면 조지 오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겪은 20세기 전체주의를 최대한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20세기라는 계몽의 절정기에서 목격한 절망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절망은 인간의 불완전함. 인간의 모순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주위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사랑이 변하고, 이유 없이 사람이 죽고 다치며, 때로는 사람 자체가 완전히 변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에서 조금 더 추상으로 나아가면,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가 보인다. 다 집어치우고 하나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참으로 대단한 점은 어느 시대에나 정설이 있고 사람들이 그것에 토를 달지 않았지만, 세계 어느 구석에서는 이 문제로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학문이 인식론인데, 인간이 외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하는 학문이다. 인식론에는 여러 가지 학설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여기서 거칠게 두 부류로 분류하고자 한다. 하나는 외부 대상은 우리의 인식 기관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 대상은 우리의 인식 기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는 언제나 대상을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경험론적 입장이다.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인식론을 채택하는지에 따라 개인의 세계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거칠게 요약하자면, 실재론자들은 인간이 이성과 감각을 통해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 사상, 도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며,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 사상, 도덕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오블라이언이 어디서 두려움을 느꼈을지 대충은 알 것 같다. 그는 무서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금 익살스럽게 예시를 써본다면, 그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자, 방 안의 공간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어 무서웠을 것이다. 이것이 확장되면서 인식구조의 불완전성으로 이어지고, 인류의 투쟁의 기록인 역사가 단순한 게임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인간의 소통과 감정의 불완전성도 두려워졌을 것이다. 즉, 오블라이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극단적인 경험론이 맞다는 느낌이 들지만, 만약 그렇다면 너무나 가벼워지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죽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오블라이언은 버클리를 읽었을 것이다. 어쩌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난 읽었다고 생각한다. 버클리는 우리가 물체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즉 우리가 물체를 감각하지 않을 때 그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경험론을 폈다. 버클리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가 방문을 닫은 뒤에 방 안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도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버클리는 방 안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방 안에 분명히 책상과 의자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버클리는 ‘신(神)’의 개념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물체가 누군가가 바라볼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이 언제나 세계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나는 버클리의 이러한 결론이 황당하다기보다는 절박하다고 느껴진다. 버클리는 머리로는 세계가 환상인 것을 알지만, 도무지 자신의 육체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는 분열 상태에 있다. 하지만 '신'의 자리를 '당'으로 바꾼 오블라이언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오블라이언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지식의 불완전성 앞에서 끈질기게 회의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끝에서, 오블라이언은 당을 신으로 만듦으로써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초월하고자 했다. 따라서 오블라이언에게 윈스턴을 설득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그냥 그를 죽인 후 공식 문서에는 윈스턴이 회개했다고 적는 편이 편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신'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당'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에반게리온>에서 이카리 겐도가 굳이 '신 죽이기'를 통해서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해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렇듯 <1984>는 작품이 중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을 다루는 종교적인 색채가 더 눈에 들어온다. 나는 <1984>의 이러한 부분이 더 조명받기를 바란다. 이래 놓고 조명받으면 또 그거대로 화나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해석이 아닌 감상이다. 다만, 기록하고 싶었고, 속은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