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 돌아본 어느 날의 기억
대학입시를 위해 재수를 하던 시절, 집 근처에 곱창볶음을 파는 작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야들야들한 곱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야채, 그리고 이 집만의 특제소스가 함께 곁들여진 그 맛이 정말 일품인 집이었다. 추억 보정을 조금 걷어내고 보더라도, 지금도 그런 맛을 내는 곱창볶음 집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이 포장마차가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맛도 맛이지만, 바로 그 포장마차 사장님의 따뜻했던 ‘인심’ 때문이다. 그분은 돈 없고 배고픈 재수생인 내게 언제나 후한 양의 음식을 내주셨다. 한껏 정신없이 접시를 비우고 나면, 남는 거라며 언제나 곱창볶음 한 봉지를 추가로 싸서 내게 들려 보내주시곤 하셨다. 배고프면 공짜로 내어줄 테니 언제든 들르라던 사장님. 허구헌 날 포장마차나 들러 결국 삼수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종종 내 마음속에 그 사장님의 얼굴이 아른거리곤 한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인심이 후한 나라에 살고 있다. 자칫 건조할 수 있는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라도, 이 인심이라는 정서가 개입되는 순간 그 관계에 온기가 더해진다. 다만, 어떤 위치에 서 있는냐에 따라, 그 친절한 마음에 고민해야할 때도 있다. 특히 받는 사람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어떤 대가성 보상을 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좋은 게 좋은거라며 인심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저것 받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합리와 불공정에 깊이 관여하게 될 수 있다.
돌이켜보니 내게도 비슷하게 떠오른 장면이 있다. 군생활 중 만난 어느 친절한 사장님과의 해프닝이었다.
몇해 전, 공군 소위로 임관한 뒤 조종사들이 소속된 비행대대에서 행정계장으로 근무하던 적이 있었다. 조종사들이 항공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행정 전반과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그 업무 중 하나가 ‘항공사 증식’ 예산 집행이었다. 조종사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의 부식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도록 편성된 예산이었다.
이 예산은 개인에게 현금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부서 단위로 집행됐다. 그래서 누군가 조종사들의 수요를 취합해 품목을 정하고, 직접 구매를 진행한 뒤 각 개인에게 나눠주는 일을 해야 했다.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혼자서 여러 사람의 수요를 반영해야 하는지라, 조종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 가지 카테고리를 정해 그 안에서만 선택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특히 반응이 뜨거운 품목이 있었다. 바로 '소고기'였다. 아무래도 내 돈 주고 먹기에는 좀 아까워도, 정해진 예산으로 먹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게 소고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부대 근처 정육점을 몇 군데 정한 후 매달 정기적으로 소고기를 대량 구매하게 됐다.
그렇게 여러 차례 항공사 증식 업무를 집행하다 보니 유독 한 정육점 사장님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곰돌이 푸'를 닮은 푸근한 인상에, 말투와 행동에서도 늘 여유가 느껴지는 분이었다. 매번 거래할 때마다 너무 친절하셔서, 개인적으로 고기가 필요할 때마다 종종 들리는 단골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주문한 고기를 찾으러 갔을 때였다. 사장님께서 내게 공짜로 소고기를 좀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이유인즉슨 그맘때쯤 내가 진급을 앞두고 있었는데, 진급 기념으로 내게 푸짐하게 고기 선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분명 사장님의 후한 인심과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고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보면 나는 매달 수백만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담당자였고, 업체와 품목을 사실상 혼자 결정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가 예산 집행에 직접 연관된 거래처 사장님으로부터 공짜 고기를 받는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부정청탁의 소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내가 처한 환경과 마음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항공사 증식 업무는 오롯이 ’나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특별히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충분히 도덕적으로 해이해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고기를 조금 받는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일도 없었다. 나는 그저 할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보상이 주어졌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만 하면 됐다. 그냥 사장님의 인심에 못 이긴 척 아무도 모르게 고기를 받아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때, 내 마음을 붙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옆 비행대대에서 같은 업무를 맡고 있던 동료였다. 어느 날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그도 같은 정육점 사장님에게 공짜 고기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더 깊은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단호하면서도 단순하게 말했다.
“난 좀 찝찝해서 거절했어. 우리가 이래 봬도 공무원이잖아. 너도 그런 제안 받으면 꼭 거절해.”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렸다. 혼자 있을 때는 흐려졌던 기준이, 누군가의 명확한 ‘No’ 앞에서 다시 분명해졌다. 결국, 나는 사장님을 찾아가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다. 개인적으로는 감사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입장에서 마음을 지키고 싶다고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괜한 마음에 불편하셨을수도 있지만, 내 말을 잘 이해해주셨고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가진 나를 더욱 추켜 세우며 응원해주셨다.
전역한 지 2년쯤 되어가는 지금, 그 일을 떠올리면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 예화’가 생각난다. 가끔 뉴스에서 접하는 유명인이나 공직자의 부정부패 이야기도 이와 닮아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뇌물이나 부정청탁은 거절하기 쉽다. 하지만 인심이라는이름으로 포장된 작은 호의는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 속에, 어느 순간 돌이킬수 없이 무너지는 걸 본다.
그래서 주변에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 두느냐가 참 중요한 것 같다. 청렴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흐려진 우리의 판단력을 다시 회복시켜 줄 수 있다. 또 그만큼 나 자신이 주변 사람에게그런 정신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할필요가 있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있는게 아니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용기 있는 지인이 되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첫 단추 한번을 잘 꿰는 게 정말 중요하다. 당시, 이 공짜 고기 해프닝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업무상 연관된 업체를 통해 상품권이나 기프티콘 등의 선물 제안을 받았었다. 하지만, 한번 단호하게 내 마음을 지켰던 경험이 있으니, 이후에는 흔들리지 않고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돌려드릴 수 있었다.
언젠가 부대 근처를 들를 기회가 있다면(부대가 도심에 위치해 있다), 그 정육점 사장님을 한 번 더 찾아뵙고 싶다. 언제나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시고, 청렴에 관해 제대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다. 또한, 이전에 내게 제안하셨던 그 고기 선물을 거부하는 일은 사실 내 군 생활에 있어 가장 큰 고비중 하나였다며 함께 웃으며 회상하고 싶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럴 일 없겠지만, 전역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다며 다시 한번 내게 공짜 고기를 건네신다면, 그때는 정말 누구보다 반가운 마음으로 받을 자신이 있다. 유혹과 추억이 모두 담겼던 그 고기 맛은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