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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ㄴㅏ름대로 Jun 27. 2022

답답함에서 시작되었으나. 브로커.

이젠 그만 생각하련다. 하지만 상영해줘서 고마워.

2022년 6월 19일 살짝 흐린 일요일 오후, 지인들과 영화 브로커를 보았다.

끝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시간, 조금 전 보았던 영화에 대한 얘기들이 가볍게 지나갔다.

오히려 가볍지 않았던 건 각자 이해한 사실관계가 다른 결말을 맞춰보고 그 의미가 뭘까 서로 묻던 시간.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고 이야기의 흐름은 곧이어 각자의 일상 골목을 돌고 돌았던 것 같다.


영화가 묵직하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그렇다고 결코 가볍게 그려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려운 듯 어렵지 않은 이런 영화가 오히려 자꾸 뒤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인 모양이다. 정리되지 않은 감상들이 어디론가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우회전만 되풀이하며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때인 6월 20일 이동진 평론가의 브로커 리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 글은 그 이후 다소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 나의 생각들이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일단 그 리뷰가 매개체가 되어 나 역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점에선 참 고마운 영상이었다.


(가능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뒤로는 영화의 주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로커 메인 포스터 중




계속 가슴에 남아있던 한 장면이 있었다.


아이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욕망이 상현과 동수와 심지어 엄마인 소영까지 끌어들였다. 그렇게 돈을 주는 입양자를 찾기 위해 각지로 돌아다니고 있는 이들은 단지 이해관계로 뭉쳐 있을 뿐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가족에게서 흔히 기대하는 그런 정서적 교류를 서로 주고받게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행위가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감독은 딱히 그 상황을 비호하지도, 그렇다고 질책하지도 않고 있었다. 진행되는 사건과 맞물려 서로 다른 판단들이 사람들의 입을 빌어 자연스럽게 나타났었고, 관객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때론 지지하기도 하고 때론 비난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감정이입을 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은 등장인물 중 하나를 그때그때 선택해 자신의 감정과 동기화시키며 이야기를 바라볼 수도 있었고,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사람은 이형사의 시선과 같은 자리에 자신의 생각을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당 장면은 그렇지 않았다. 영화 후반 그런 그들이 임시 거주처인 모텔이라는 공간에 모여 있었던 장면 중 하나였다. 스토리상으로도 메시지상으로도 꽤 중요한 장면이었다. 극 속에서 동수가 일부러 모텔방의 불을 끄고 소영이 발화할 수 있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감독 역시 대놓고 "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어."를 의도적으로 외치는 장면이었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이야기 방식에 살짝 당황스러웠고, 한편으론 부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 더하여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표지판을 보며 자연스럽게 진행하고 있던 도로 위에 갑자기 순찰차가 나타나 진행차로를 막고 정해진 옆 차로로만 지나가라고 하는 듯한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이동진 평론가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와 의견은 다르지만 해당 장면의 이질성과 그 이질성을 삽입한 감독의 의지에 대해선 비슷하게 느꼈다고 보인다. 난 감독의 성향과 이전 영화에 대해 잘 모르기에 평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지, 그래서 그 장면이 감독의 이전 영화 장면들과 얼마나 이질적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왜 그렇게 했지?'라는 해석되지 않았던 의문은 지금까지 흘러가던 스토리 진행방식과 갑자기 달라진 결 때문이었고, 그 와중에서도 너무 분명하게 느껴졌던 것 한 가지는 그렇게 해서라도 해당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감독의 '의지'였다.


한편으론 분명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마치 굿윌헌팅의 유명한 대사이자 장면이었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를 반복해서 말해주는 상황과도 같았는데 굿윌헌팅에선 해당 장면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맘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면 브로커에서는 이 장면에서 같은 기능을 기대했겠으나 최소한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오히려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눈앞의 화면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맘속에선 그 장면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냥 그렇게 감독의 능력이나 영화적 수준을 쉽게 평가절하하자니 그 또한 맘에 편치 않은 무엇인가를 넘어서야만 했다. 소화되기 거부하는 음식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 그건 어쩌면 내가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켰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듣고 나니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 장면의 표현 방식은 정말 의도적이었구나!' 물론 감독의 의도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곰곰이 의도를 생각해보니 이젠 그 장면이 이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외형적인 대안가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하게 되는 흔히 기대할 법한 그런 아름다운(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이 이 영화의 결말엔 없다. 오히려 외형적인 모습은 반대에 가깝다. 물론 끔찍한 범죄의 결과이기도 했기에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은 이유도 있겠으나 함께 모여 웃음을 나누고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의지가 되었던 그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가능성도 일부러 배제한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은 움직이는 차량(=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계속 흔들거리는 사진으로 대변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은 것이지..?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거지? 이 주제에 대한 답은 뭐지?






감독은 의도적으로 깊은 상처와 아픔을 지닌 이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을 관객들에게 소비되는 서커스의  출연진으로 다룰 것이 아니었다면 다른 이유가 필요했고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다. 그 출발점에서 감독은 스스로에게 대답한 모양이다. 그들에게 자신을 억누르는 자괴감이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어쩌면 감독인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이자 의무라고.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옆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받아 채워지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자신에 대한 애정이자 스스로에 대한 통찰이기도 했다. 우성이를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알다시피 모두 버림받은 존재들이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이들과 한때 사랑했던 아내와 딸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까지. 소영은 외형적으론 버리는 존재이겠으나 그녀도, 결국 그녀 주변의 이들도 알고 있었다. 자식을 버리는 순간 엄마도 버려지는 거라고.




소영 대신 늘 우성이를 안고 다니던 동수(강동원). 우성이는 어린 시절의 동수와도 같았기에 영화 현실적으론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소영 대신 주로 동수가 안고 있었으나 의미적으론 현재와 과거에 놓인 같은 수레바퀴 위 운명공동체가 포대기라는 공간의 형태로 같이 묶여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그 포대기가 어디서 풀리느냐에 따라 둘의 운명은 출발한 시각만 다른 동일한 철로 위 열차가 될 수도 있었고 아예 다른 철길로 나아가는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우성이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수는 우성이를 안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우성이의 운명이지 동수가 현재 헤쳐가고 있는 인생과는 달랐다. 우성이가 아무리 좋은 곳에 입양이 되었더라도 동수 인생의 어둠이 걷힐 수는 없었다. 동수의 삶에 눌어붙은 그림자는 동수 안에서 빛을 찾아야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성과 동수, 마치 원을 그리듯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운명, 그걸 대변하는 듯한 대관람차. 다행히도 우성과 함께 두 번째 올라탄 원에서는 동수가 빛을 찾아낸 것 같았다. 눈이 가리어진 소영은 자식을 버린 모든 엄마를 상징하고 있었고, 덕분에 자식을 버린 모든 엄마들의 범죄사진에서 지워졌던 각자의 사연과 감정들이 반대로 소영을 통해 말없이 소환될 수 있었으며, 그걸 동수가 읽어주고 있었다. 이제 동수에게선 엄마에 대한 그리움 뒤에 남겨져 있던 어두운 원망을 걷어낼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브로커 스틸샷(편집)




상대방의 동정에도 상대방의 비난에도 거칠게 반응했던 소영(이지은). 삶 전체가 부정당함의 연속이었던 소영 역시 동수를 통해, 그리고 함께 동행했던 이들을 통해 자식을 버려야만 했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씩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에서도 역시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고 보인다. 부족한 엄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겠으나 마지막의 선택은 결국 엄마 소영으로서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정리되니 영화 초반 아이를 안고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언덕길을 올라 십자가가 달린 교회에 다다르는 설정은 마치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를 일정 부분 떠오르게 했다. 자기 자식을 버리려는 소영과 죄 없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마는 왜 나에겐 그 이미지가 겹쳐졌을까. 소영은 죄를 지으러 올라가는 중이고, 예수는 자신이 짊어진 인간들의 죄를 풀어내고자 올라가고 있는 것이기에 본질적인 의미에선 큰 차이가 있겠으나 아마도 감독은 그 언덕길의 고통을 본 것 같다. '니가 없어야 내가 살 수 있어.'라고 속으로 계속 정당화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없어야 니가 살 수 있어.'라고 외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우성이를 품에서 내려놓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걸음걸음은 소영에게도 정말 고통의 길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그 길은 버려지는 길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기도 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골고다의 길 역시 일차원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길이었다. 그렇게 엄마를 버리러 가는 소영은 자신이 버린 엄마라는 존재를 우성이를 들어 안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다시금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안기를 애써 거부했던 우성이를 영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안아주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 진실된 안아줌이 결국 차가웠던 소영의 마음과 삶에도 조금씩 온기를 더해주었다. 동정받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과거도, 아무런 희망이 없던 자신의 미래도, 마침내 버린 엄마라는 존재도 결국 끝끝내 버려지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브로커 스틸샷(편집)




행복에 올라탄 적이 있었으나 언젠가 떨어지고 이제는 버려진 상현(송강호). 다른 방식으로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상현은 다시금 행복을 되돌리는 꿈을 꾸었다. 돈이 생기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도박이라는 나쁜 습관을 제외하면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기본적으로 따뜻함을 지닌 이였다. 아이러니하지만 아이를 팔아 가족을 만들어주는 그의 행위는 부당하게 돈을 버는 모습이자 범죄임에도 자녀가 있고 부모가 있는 (자신이 예전에 누렸던) 정상가족의 형태를 꿈꾸는 그에게는 그렇게 나쁜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하기도 한다. 매일매일 더러워진 얼룩을 세탁하고, 헤어지고 떨어진 옷을 꿰매고 기우는 상현의 삶은 가족에 대한 죄의식의 씻음일 수도 있고, 세탁과 수선을 통해 새 옷처럼 나타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너무 늦었다. 열차 안에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은 상현이 소영에게 했던 말이지만 결국 그 말은 상현이 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 말에 위로와 기대를 담을 수는 있었겠으나 엎어진 과거를 다시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상현은 처음엔 나름 진심으로 건넨 말이었겠으나 그 말이 현실을 담보할 수 없음을 말하는 순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 그 말을 다시 내뱉을 수 없었을 거고, 그렇게 상현은 시간이 흐를수록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인물이었다. 꿈에서 그리던 딸을 만났지만 그 시간은 결국 꿈이 깨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이 너무 늦어버린 현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난 상현은 그 뒤로 점점 냉철하게 상황을 보기 시작한다. 따뜻했던 상현이 오히려 사라져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신 상현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당장 바꿀 수 있는, 그리고 당장 지켜야 하는 현실에 집중하는 선택을 한다. 곧 땅에 떨어질 듯 상현의 왼팔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딸의 인형과는 달리 이제 상현의 시선은 유아복을 파는 상점 안쪽에 깊숙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한편으론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스스로 내리는 벌이었을 것이다. 그 벌의 대상은 바로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그에 걸맞은 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현은 이전까지는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벌(=가족과의 헤어짐)을 부정해왔으나 이제는 그 벌을 받아들인다.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은 상현에게 본질적인 벌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까지 상현은 우성이에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보여야만 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가족을 지켜낸 아버지로는 남았으니 그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라는 공허한 말보다 상현에겐 훨씬 현실적인 위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로커 스틸샷(편집)




아직 어린이지만 입양이라는 기준점에선 이미 유통기한 지난 상품처럼 대우를 받는 해진(임승수).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에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게 자길 데려가 달라 얘기하는 이였다.(그게 더 슬퍼) 어이없게도 해진은 아무도 원치 않는 이들의 차에 몰래 올라탐으로써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 원래 있던 멤버들은 당연하게도 해진을 떼어내려 하지만 그러기엔 자신들의 비밀 또한 새어나갈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동행시킨다. 마치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이 처음 뭉쳤던 것처럼. 가족애와는 관련 없는 또 하나의 이질적인 이해관계가 얽혀버렸다. 그런데 그런 해진이 차에 동승하면서부터 아이러니하게 차 안에 가족애가 조금씩 풍기기 시작한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축구공과 같은 해진의 엉뚱한 행동이 그들에게 순수한 웃음을 거품처럼 선사하기도 하고, 가족 중 누군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대하는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도 일조한다. 어떤 면에서 해진이 가진 욕망은 단순하고도 순수했다. 그저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옆에 있길 바랬으니까. 그것이 처음엔 해진과 다른 이들을 구분 짓는 차이였으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해진은 가족이라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캐릭터였는데 막상 그 욕망은 결국 나머지 사람들이 품고 있는 희망과 기대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해진 덕분에 숨겨졌거나 억눌렸던 욕망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족적인 역할 수행도, 가족에게 기대할 법한 감정도 보다 수월하게 표현이 된다. 이전에는 혼자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으나 그건 개인의 놀이일 뿐 축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제 해진이 가졌던 축구공은 선수와 선수 사이를 오가는 진짜 축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해진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어느새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브로커 스틸샷(편집)




그렇게 감독은 각 등장인물들에게 나름의 '빛'을 선사했다.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지금까지 그들을 뒤덮고 있던 두터운 어둠을 뚫고 걸음을 내디딜 정도는 되었다. 때때로 어둠 속에 진실이 있기도 한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들여다보기 어렵거나 두려울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진실을 마주 대하면서 자신이 현재 해야 할 것을 묻고 스스로 선택을 한다.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 꼭 가족이라는 형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비난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역시 그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는 것. 그게 가족이면 좋겠지만 굳이 가족이 아니어도 필요한 관계이자 경험이다. 특히나 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 그들의 흩어짐은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이란 무엇이고,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단순히 대안가족 모습 하나를 제시했다면 감독이 어떤 모습을 제안했더라도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누군가가 씌워주는 우산은 고맙고 따뜻하다. 서로에게 우산이 되어주는 것이 가족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은 그보다 등장인물 스스로 자기 우산을 펼칠 수 있길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야만 스크린이 내려가더라도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감독은 스크린이 펼쳐졌을 때까지만 책임질 수 있으니까. 앞서 얘기했듯 그것이 자신이 불러 모은 이들에게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의무였기에. 다만 고레에다 감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긴 생각들의 첫 입구가 되었던 장면으로 되돌린다면  '왜 그렇게 했지?'라는 해석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대답 하나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장면에 퍼진 음성과 대사는 한편으론 스크린 안에 있는 배우들을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스크린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려지길 바랬던 목소리였다. 내가 그 장면에 바로 호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 누군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을 정하고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향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영화 속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이 감독의 생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 그런 의지를 왜 가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또한 이번 영화에서 감독이 자신에게 부여한 일종의 '의무'에 속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감독의 '의지'였다.


이 영화의 초점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레에다 히로카즈) 물론 이것은 감독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추측이자 해석이다. 이 영화가 특정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해당 사건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정작 이 영화가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사건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든다.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였다.



브로커 스틸샷 중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난 영화평론가가 아니니 굳이 별점을 줄 필요도 없어 다행히 그런 면에선 자유롭다. 물론 아쉬웠던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했다는 것은 그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들도 보다 적절한 자리에서 보다 견실하게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설정한 발판들의 개연성에 충분히 설득되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영화 내 설정들은 매우 정교하게 잘 기획되었으나 대신 자연스러움이 빠진 느낌이랄까. 마치 일본의 정원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처럼. 그로 인해 그토록 중요했던 인물들의 '변화'는 인위성의 냄새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로 세탁이 끝난 세탁소의 옷처럼 보이고 말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들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힘줘서 노래하는 것보다 편하게 노래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데 송강호의 연기가 노래에 비견된다면 정말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는 별개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그 연기가 자꾸 다른 이미지와 겹쳤다는 점이다. 기존에 이미 등장했었던 인물들을 모아 비슷한 역할을 부여한 느낌이었는데 특히 소영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다시 섭외한 느낌이었으며, 1987의 강동원, 복수는 나의 것의 배두나, 기생충의 송강호가 자꾸 같이 보였던 것은 단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을까 싶긴 하다.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고서 각각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던 대표 예능인을 불러 모아 팀을 꾸렸으나 이전 프로그램에서 사용하고 있던 캐릭터를 비슷하게 가져와서 합쳐놓은 느낌을 좀 받았던 것 같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외국인 감독으로서 한국인 배우를 쓰는 상황이었으니 자신이 생각한 캐릭터에 가장 알맞은 이를 섭외할 때 이미 검증되었던 역할 수행자 중에서 찾아 소통과 디렉션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을 수는 있겠으나 그럼으로 인해 브로커의 독창성 저하는 태생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각 캐릭터를 대하는 감독의 세심한 태도와 깊은 애정엔 정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감독은 한편으로 등장인물에게 전능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자리이나 오히려 감독이 메가폰을 청진기처럼 캐릭터의 가슴에다 들이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등장인물의 작은 동작, 감정과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세밀한 설정과 다양한 은유들은 영화를 본 뒤에도 계속 그 맛이 입안에 맴도는 중이다. 감독 덕분에 한 명 한 명의 캐릭터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영화 덕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을 쓰게 되었다. 상영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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