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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Mar 23. 2023

천천히 흐른 시절

경민이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하지만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이가 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인 대학교 4학년, 중앙도서관에서부터 일 것이다. 같은 학교 다른 과로 진학했던 경민이랑 나는 취업에 실패한 후 패잔병의 모습으로 중앙도서관에서 재회했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재회한 어색함도 잠시였다. 전에 몰랐던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과 공연과 맥주주 좋아했다.


경민이는 여행에세이를, 나는 소설을 좋아했다. 중앙도서관에서 취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책들을 엄청나게 읽고  간간히 취업 공부를 하며 이력서를 썼다. 벚꽃이 흐드러지면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참치김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고 수다를 떨었다. 읽다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만한 문장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경민이는 서점에서, 나는 공부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봤다. 공연도 좋았지만 경민이랑 본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게 사실은 더 좋았다. 우리는 분명 같은 것을 봤는데도 서로 다른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때론 가볍게 때론 진지하게 토론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는 참 좋았다.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는 맥주를 마셨다. 명분은 매번 달랐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맥주잔을 부딪히며 서로를 한껏 흐트러지게 두었다. 서로의 연애에 참견했고 이별하면 돈을 더 긁어모아 좀 더 비싼 안주에 맥주를 마셨다.


돈이 없던 시절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그 시절의 우리는 버틸 만큼만 돈을 벌고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읽은 책과 함께 본 영화와 연극들과 함께 마신 맥주가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시간은 실타래 풀리듯 풀려 어느덧 10여 년 흘렀다. 그사이 우리는 무사히 직장인이 되었다. 각자의 가정도 꾸렸다. 그때보다 주머니는 무거워졌지만 이제 우리의 시간은 그때보다 빠르게 흐른다. 마음을 내고 시간을 맞춰야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나기만 하면 그때로 돌아간 듯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경민이에게 다음 달 만나자고 연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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