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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합격 도시락: 유부초밥(2)

14.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by 겨울꽃

# 아내의 도시락을 싸는 남자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 임용고시를 치른 때가 2017년 11월이었는지, 12월 초였는지 모르겠다.

시험을 치른 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시험날 새벽에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고사장으로 갈 준비를 하는 사이, 감사하게도 남편이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편히 쉬고 싶었을 주말 아침에 갓 지은 밥으로 유부초밥을 만들던 남편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말씀을."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시험 치러 갈 거지?"

"흐흐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교사 임용고시를 치르던 당시에는 1교시에 교육학 논술 시험을 치르고, 2교시 전공 시험을 마친 다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3교시에 마지막으로 전공 심화 시험을 치르고 마쳤다.

수험생들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고사장을 이탈할 수가 없기에 각자의 점심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새벽에 조금 일찍 일어나 간단히 계란이나 삶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유부초밥 도시락에 후식으로 방울토마토까지 넣어주며 따뜻한 차가 담긴 보온병과 함께 쇼핑백에 알뜰히 챙겨주었다.


마흔일곱 살에 치렀던, 합격이라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험이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시험을 치기로 결심을 하고 남은 기간 동안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쥐어짜가면서 시험공부를 했다.

너무 힘든 날은 시험 치러 가지 말까? 내가 왜 이 늦은 나이에 시험을 친다고 이 고생을 할꼬.....

욕심 같은 선택에 자책도 자주 했다.

시험 치러 갈 거냐는 남편의 질문은 포기하고 싶어 하던 나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의 유머 섞인 응원이었다.


어쨌든 그날따라 그가 만든 유부초밥은 너무도 맛이 있었다.

나는 함께 시험을 치르던 주변 사람 몇몇에게도 자신 있게 남편의 유부초밥을 나눠주며 맛있게 싹싹 다 비웠다.


# 중등 2급 정교사 임용고시傳


교사가 되고 싶어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르고 결과 발표를 기다리던 서른 중반.

나는 1차 필기시험에서 단 0.5점 차이로 불합격했다. 그러니까 단답형 한 문항만 더 맞았어도, 아니 답을 고쳤던 그 문항만 그대로 뒀어도 합격이었던 것이다. 그게 다 실력이 부족해서였지만 떨어진 시험에 대한 속상함과 안타까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엎드려 울면서 다시는 임용고시를 치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시험 준비를 하며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당시에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가족여행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못 보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남마저 줄였었다. 집안 살림은 서글프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음에도 먹을 것이 부실했던지, 엄마가 시험 준비하던 그 1년 동안 아들은 키가 1Cm밖에 자라지 않았다.

늘 시간에 쫓겼으며, 이제 막 졸업한 쟁쟁한 젊은이들조차 합격하기 어려운 시험을 친답시고 김장 날 오지도 않는다며 나에 대한 미움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던 시집 식구들에게 마음도 많이 다쳤다. 스트레스로 남편과 부부싸움마저 잦았다.


대체 그거 아니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내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줌마'인 내게 하던 말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니던 독서실 주인 여자는 내가 임용고시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 그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사범대학 졸업생이 나와 같은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가르쳐 주면서 아줌마인 나에게, 너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공무원 하는 건 어떠냐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그건 쉽나?^^) 수산청 공무원은 어떠냐고 말이다. 참고로 나는 수산청이 뭐 하는 곳인지 아직까지 잘 모른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 한 명도 내 편이나 나를 위해 응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남편도 남들이랑 똑같았다.

그는 심지어 아내의 시험 준비를 귀찮아하였다.


우리 아들은 엄마인 나에게

"엄마 시험 떨어져야 한다."

내가 놀라서 왜냐고 물으니

"엄마 일하러 나가면 다 힘들어지잖아."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밤마다 기도를 했단다.

"우리 엄마 선생님 안되게 해 주세요.."

대체 어느 누구의 가스라이팅이었는지, 범인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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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신은 그 어린 녀석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나는 정교사를 포기하고 이후에 기간제 교사와 시간 강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 보탰다.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 시댁과 친정 대소사 등 구정물에 손 넣을 일에는 죄다 불려 가며 충실한 프리랜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마흔넷에 본격적으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열심히 기웃거린 끝에 교육청 공무직 선발 시험이 있어 응시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내 전공을 살린 공무직종으로 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정교사에 대한 꿈을 접었다고 했으면서도 공무직으로 일하던 첫 해에는 임용고시 응시자격에 새롭게 포함된 한국사검정능력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나는,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조차 쉽지 않던 '정교사'의 꿈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일에 매진한 지 사 년째 되던 해, '신규교사 모집 예비 공고'에서 갑작스럽게 많이 늘어난 내 전공과목의 모집 인원을 보게 되었다.

몰랐더라면 그냥 지나갔을 것을,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늘 그 언저리를 맴돌던 나는 늘어난 모집 인원수를 본 후로 시험을 쳐볼까, 말까 하는 마음의 갈등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다.

많이 뽑아 기쁘기보다는 절망스러운 마음에 힘들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도 필요에 의해 전공과목을 공부하긴 했었지만 - 내가 하고 있던 공무직의 일이 나의 전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신규교사 모집이 없었던 터라 공부를 거의 손에서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학교 일을 병행하면서 물리적으로 부족한 시간을 타고난 지능(!)과 잠을 줄이는 것으로 메꾸기로 하면서 나는 '하면 된다'를 마음으로 외우고 '운빨'도 기대했다.

가련하고 안쓰러운 노력이었지만, 세상에는 '해도 안 되는 노력'도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터득해서였는지 준비과정이 전처럼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던 거 같다.

마흔이 넘어 인생의 절반을 산 여자에겐 합격이냐 불합격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


# 그리고 합격이었다.

힘들었던 2차 면접시험을 끝내고 더 이상 후련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한 기분이 들었을 때, 어느 날 저녁 남편이 말했다.

"당신 이번에 합격할 거 같다."

"어째서요?"

"꿈을 꿨거든."

"흐... 무슨 꿈인지 궁금하네요."

"얘기하면 안 되는데, 복 나가는데..."

"아니 듣고 싶어요, 이미 나갈 복도 없는 거 같은데?"

"꿈에서 당신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데 또 다른 목걸이를 걸더라고."


그리고 합격이었다.

교육청 홈페이지에서 나의 수험번호와 이름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다음 날 신체검사하러 가야 되는데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가슴떨림이 다음 날까지 이어져 신체검사로 불합격될까 봐 걱정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2018년 3월, 마침내 나는 남들이 명퇴를 시작하는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정교사가 되었다.

유부초밥은 이래 저래 나에게 특별한 음식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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