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입시 3
“고모, 학원 선생님이 내신 관리는 세 과목만 하래요. 국어하고 영어, 그리고 사탐 중에서 한 과목만 선택하면 된대요.” 그 짧은 문장이 나에게 준 혼란은 길고 깊었다. 세 과목만? 학력고사 세대인 내게 좋은 내신이란 음·미·체를 포함한 전 과목 성적이 골고루 우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세 과목이라니? 물론 전 과목을 잘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갈 확률이 높아지지만, 각 대학 전형에 맞게 몇 과목만 선택해도 된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사탐 중에 한 과목? 조카에게 미안했지만, 사실 난 사탐이 하나의 독립된 과목인 줄 알았었다. 사회탐구라는 영역에 한국 지리, 세계 지리, 정치와 법,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 같은 다양한 과목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1학년 때는 통합사회를 하고 2학년이 되어서 사탐 중 원하는 과목을 선택한다는 것도 몰랐다. 입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내가, 과연 조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미술 학원의 존재가 고마울 뿐이었다.
1학년 내신이 좋지 못한 조카에게 국어와 영어, 그리고 사탐 중 한 과목의 내신만 관리하면 된다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수학을 안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국·영·수 중심의 ‘학력고사 세대’인 내게 수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의 소신대로, 배움의 본질이 입시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조카를 설득했다. 미국 명문대생들도 쩔쩔매며 혀를 내둘렀다는 대한민국 고등학교 수학, 더구나 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조카에게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수학이었지만, 결국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시험 범위는 유리함수와 무리함수, 순열과 조합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단어들이었지만, 나의 미천한 수학 실력이 들통나지 않을 비장의 무기가 있었기에 걱정은 없었다. 바로 ‘설명’이었다. 조카가 하루에 한 문제만 제대로 설명해도 수학 점수는 ‘따 놓은 당상’ 일 것 같았다. 설명을 위해서는 공식 암기는 물론이고, 원리 이해도 충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도 더, 조카는 수학을 잘하고 좋아했다. 물론 다른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했다는 뜻이니 오해는 금물! 조카는 그동안 배운 내용에 자신만의 방법을 더했다. 때론 답안지와 다르게 풀기도 했지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저렇게도 풀 수 있구나’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덧 다음 문제를 기대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왜 그런지를 묻는 내 질문에 답하는 조카의 목소리와 몸짓에는 자신감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곧,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다. 재밌지만 입시에는 도움 안 되는 세상 느린 공부로, 그나마도 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조카에게는 배움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술을 전수해 줄 능력이 전혀 없었다. 수학을 안 해도 된다는 조카를 반강제로 설득해 놓고, 결국 ‘포기’를 말했다.
“아․․․․․․․” 조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도 무척이나 즐거워했기 때문이었다.
입시에만 매몰되지 않겠다는 원대한 이상은 조카에겐 아쉬움을, 나에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남긴 채 현실로 대체되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하면서 대학에 가는 게 맞을까?’라는 의문은 끈질기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막상 조카가 대학에 가도 ‘생각보다 재미도 없고 별로 특별한 것도 없네!’라며 실망할 것 같았다. 어쭙잖게 교육의 본질을 고민하던 나에게 조카의 한마디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고모, 저는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어떻게 공부하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랬다! 조카는 명문대를 원하는 것도, 조금 더 나은 직장을 위한 명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조카는 ‘대학의 간판’이 아니라, ‘대학 공부’를 원했고, 남의 인정이 아니라 본인의 만족을 위해 대학에 가고 싶어 한 것이었다. 대학에서 배우는 디자인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호기심이 있는 학생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데 정작 어른이라는 나는, 호기심과 입시 경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만 하고 있던 것이다.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이 딱하다는 이유로, 과도한 입시 경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유로, 현실적 대안도 없이 입시의 모든 것을 부정만 한 채, 색안경을 끼고 있던 것이다. 어쩌면 조카는 ‘대학가도 별거 없다는 어른들 말도 틀렸어. 진짜 재밌어’라며 대학 생활을 마음껏 즐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이가 직접 경험하면서 배워야 할 것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히 많고 소중하다. 그런데 그 기회들을 내 좁은 식견으로 재단하고 있었다니! 아이가 원하는 도움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홀가분하고 과감하게 수학책을 덮었다. 비록 즐겁고 행복했던 수학 공부는 끝이 났지만,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 또한 소중한 공부가 될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기말고사까지 남은 열흘 남짓한 시간! 겨우 열두 척의 배로 왜구를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처럼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 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 했던 입시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