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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Jan 23. 2023

막존지해(莫存知解)

라면 덮밥

어제 일이다.

미팅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을 놓쳤다. 아니 정확히는 점심시간을 놓쳤다기 보다, 보통 보다 30분 정도 더 늦게 끼니를 챙기기 되었다. 같은 소속의 팀은 연구소에 있고, TF 조직이기 때문에 나만 덜렁 서울 본사에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나마 한 명 있던 같은 팀 친구도 연초부터 전환 신청을 해 이제 정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코로나의 일상은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사내 인맥들의 연줄을 끊어 놓았다. 좀 친해진 친구들은 자회사로 발령받아 나가거나, 아예 분사된 조직에 속하게 돼 그나마 가끔 보던 얼굴도 못 보게 되었다. 사무실은 유연 근무를 해, 출퇴근은 물론 점심 먹는 시간까지 서로 다르다. 때문에, 언젠가부터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코로나가 한참 창궐했을 때는 도시락을 싸오거나 아예 점심을 거르는 직원도 많았다. 그래서 시작된 혼밥..

이 생활을 3년 가까이하다 보니, 이제 익숙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편하다. 가뜩이나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는 직장에서 점심시간이나마 자기 마음대로 하고, 올곧이 점심시간을 즐기는 요즘 친구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또 공감도 된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기보다는, 혹시 나보다 윗사람이 고르는 메뉴가 어제처럼 최악이었나, 이런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맛집 고집하는 분을 만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긴 웨이팅 시간을 대기하기도 했었다. 예전의 사무실 막내들은 어떻게 점심시간마다 사무실 막내들이 팀 내 고참들이 가자는 곳을 말하면 먼저 뛰어다니고 자리를 잡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그렇게 하라고 시켜도 거부하거나, 사내 인력팀에 고발 당하기 일쑤일 것이다. 

점심시간은 그저 직장 생활 한복판에 한 끼를 때우는 시간이지, 맛집 탐방이나, 수다를 떨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편이다. 오늘은 근처 분식집을 찾았다. 집사람이 인스턴트는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는 메뉴를 일부러 고른다. 이 집의 라면 + 김밥 세트. 오랜만이다. 삶은 계란 하나도 추가한다. 도시 노동자의 소박한 찬이다.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학생 식당에 라면 덮밥이라는 메뉴가 있었다. 1,500원이었는데, 자취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유난히 지방에서 유학 온 친구들이 많다는 대학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취생들도 많았고, 요즘도 대학생 자취 원룸 물가가 오르거나 구하기 어렵다는 기사가 나오면 대표적으로 소개되는 학교다. 아무튼 자취생들의 얄팍한 주머니 사정과, 상대적으로 많은 자취 학생이 만들어낸 기이한 인연의 결과로 만들어진 풍경이, 라면 덮밥 메뉴의 줄은 항상 길었다는 것이다. 라면 덮밥은 말이 덮밥이지, 그냥 라면을 밥 위에 얹어준다. 그리고 김치는 아주 많이...

학생 식당에서 1,500원짜리 라면 덮밥을 허겁지겁 먹던 그 대학생은 이제 30년이 지나서 회사 근처 분식점에서 6,000원짜리 라면 + 김밥 세트와 500원짜리 삶은 계란을 먹는다. 세월은 변했지만 입맛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다만 변한 것은 20대 새파란 대학생들의 왁자지껄하게 친구들하고 떠들며 먹던 그 분위기가, 이제 적당한 무관심과 거리 두기 속에 보이지 않게 쳐진 쉴드 속에서 혼자 먹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20대에는 더 어울리고 섞이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은 더 분리돼고 떨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인력과 척력의 관계일까? 살아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더라는 성찰의 결과일까? 아니면 판데믹이 가속 시킨 일시적인 사회적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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