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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Aug 07. 2022

그렇게, 앙티브

여행지를 고르는 시간

이른 , 여름휴가는 아직 계획에 없었다. 계획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어떻게든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휴가를 꿈꾸는 것이 사치인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련된 솜씨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쿨하게 일주일쯤 떠나고 싶었지만, 도무지 탄력이 붙지 않는 일을 붙들고 하루 온종일 자괴감과 허무함 사이를 오가던 시기였고 차라리 마감일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어른이 되고 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름"이라는 단어와 "휴가"라는 단어를 혼동하지 않는 분별력을 어렵게 길러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일을 내팽개치고 떠난 휴가는 그다지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배웠기에, 휴가보다는 당장  앞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봄의 나는, 오후 해가 점점 길어지고 어디에나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숲이 연한 초록으로 새로이 피어나는 계절의 설렘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마음이 비좁았다.   


그래도 일요일 아침이면, 그와 나는 집에서 커피를 내리는 대신 동네 카페에서 여유를 누렸.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추어  손님으로 들어가면 햇볕이  드는 작은 테이블을 차지하고서 얼마간의 고요함을 즐길  는데, 일요일이라서 아침을 조금 천천히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덕분이리라.  번째 커피를 주문할 적당한 타이밍을 확인하는  외에 그와 나는 별달리 대화는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자고 합의를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일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우고 하루치의 에너지를 다독이기 위한, 그러니까 굉장히 사적인 시간인 것만 같아서이다. 주로 책을 읽거나, 수도쿠 같은 퍼즐을 하거나, 미뤄둔 간단한 일들을 노트북으로 처리하면서 각자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러다 보면 얼추 카페 옆의 브루어리가 문을 여는 시간이 된다. 일요일이면  4시간 동안만 간단한 브런치와 미모사를 내어주고 쿨하게 문을 닫는 곳이라 널찍한 공간이 단골손님들로 가득 차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시간 즈음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페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동네 사랑방 같은 브루어리의  bar 자리로 옮겨 앉아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특별할  없는 일요일 오후  때를 보내곤 했다.


어느 봄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나는 카페에서 읽을 책으로 두툼한 론리플래닛, 프랑스 편을 골랐다. 스페인, 이태리, 프렌치 폴리네시아 등등 다른 지역 편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날은 프랑스였다. 그의 책장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낡은 책이기에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보도 있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어쩌면 최신 개정판에서는   없을 보석 같은 이야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기대하기도 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없던 시절의 여행 방식을 다시금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커피  잔을 마시는 동안, 나는 프랑스 남부를,  중에서도 프렌치 리비에라 (혹은 코트다쥐르) 상상하기 시작했다. 달콤했다. 가본  없는 장소에 대한 묘사를 사진이 아닌 글로 만나는 일은 특별할  없는 일요일 오전의 커피타임에 화사한 생기를 불어넣어 기에 충분했. 새로운 지명 이름이 나올 때마다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를 펼쳐 위치를 익혔다. 대체로, 같은 작품이라도 영화보다 책이 주는 감동이  선명한 것처럼, 깨알같이 빼곡한 론리플래닛의 조그만 활자를 눈으로 좇으며 머릿속으로는 부지런히 프렌치 리비에라의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파란색과 하얀색을 칠해나갔다. 망통, 모나코, 니스, 앙티브, ,  라파엘, 생트로페즈,   사이사이의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난감한 프랑스식 이름들.



"오늘은 프랑스로 여행하니?" 하고, 그가 물었다. 틈날 때면 지도를 펼쳐놓고 가상 여행을 떠나는 것이  취미인 것을 아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오늘은 프랑스로 가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 우리가 정말로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역시, 일을 마무리할 수나 있을는지조차 몰라서 휴가는 사치인 것만 같았던  봄날, 낡은 론리플래닛을 들여다보면서 상상하던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게  줄은 몰랐다. 그저, 일이 막힐 때면, 컴퓨터의 커다란 화면에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프랑스로 날아가 여기저기 기웃대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했다. 굵은 글씨로 표시된 대표 도시들과 어디선가 들어본  있는 익숙한 이름의 소도시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가본  없는 낯선 곳들의 공기와 햇살을 상상하는 일은 하루 종일이라도 지루하지 않았기에 다시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분별력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프렌치 리비에라" 혹은 "코트다쥐르" 찾아보는 대신 "앙티브"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치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렌치 리비에라 여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마을이 몇 개 있었는데, 앙티브 Antibes 도 그중의 하나였다. 앙티브는 유명한 도시인 니스 Nice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기차를 타거나 직접 운전을 해서 또 다른 유명한 도시인 칸 Cannes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서 피카소 뮤지엄과 성벽 산책로와 구시가지의 아기자기한 골목을 둘러보기 좋은 작은 마을로 알려져 있는 듯했다. 골목골목마다 조그맣고 제각각으로 매력적인 식당과 술집이 빼곡하다고 했고, 지중해를 끼고 굽이치는 성벽 산책로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했다. 걸어서 다니기 불편함이 없는 적당히 작은 마을, 사람들이 한나절을 보내러 오는 매력적인 마을, 낮에는 산책로를 걷고 해변에서 놀다가 밤에는 골목에 내어놓은 식당 테이블에서 와인잔을 기울일 수 있는 미식의 마을, 심지어 이름도 예쁜 마을, 앙티브.  


여기저기 타인의 여행기를 기웃대던 중에 문득, 내가 사진은 건너뛰고 활자를 찾아 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멋진 사진들을 만나면 감탄을 하며  번씩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경험했는지를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글로 읽는 편이  좋았던  같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글을 씀으로써 경험을 묘사하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구체화하는데, 낯선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듯 으면서 그들이 묘사하는 장소들을 상상하다 보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영상보다 글을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앙티브라는 마을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봄이 저물고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비로소 마감일에 맞추어 일을 끝낼  있을  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진행되어 무사히 일을 끝낸다면, 열흘쯤 훌쩍 떠나기에 그보다  좋은 명분이  있을까 싶었다. 그즈음의 어느 일요일, 우리는 동네 브루어리의 지정석 같은  자리에 앉아 여름휴가 계획을 세웠다. 아니, 정확히는 여름휴가 장소를 정했다. 언젠가는  해보고 싶은 테마 여행이나 방문하고 싶은 장소들이 생길 때마다 틈틈이 기록해  공유 노트 페이지를 들여다보면서, 세상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자동차 로드 트립으로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낭만, 언제 가도 좋은 캘리포니아 작은 마을에서의 여유, 캐리비안 어느 섬에서의 스노클링, 완전히 게을러질  있는 크루즈, 그렇다면 크루즈의 꽃인 지중해, 그래도 그리스 섬은 스쳐가기보다 머무르는  매력, 하지만 여름의 그리스는 너무 덥지, 남부 이태리도 너무 덥겠지. 그렇게 입으로 세계 여행을 하던 , 프렌치 리비에라와 앙티브가 떠올랐다. 낮에는 성벽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고, 밤에는 아기자기한 골목에서 맛있는 해산물과 와인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을, 앙티브! 처음 들어보는 마을이라고 했으면서도, 그를 꼬드기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브루어리의 영업 마감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우리는 프랑스 니스행 항공권을 샀다. "너네는 꼭 여기서 여행 계획을 세우더라, 부럽게!" 하고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해도 그 귀여운 미소가 매력적인 바텐더 아가씨에게 미모사 한 잔을 더 부탁하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가는 유럽인가! 심지어 이름만 들어도 로맨틱한 프렌치 리비에라에 간다니! 그 순간 나 자신도, 다가올 우리의 여름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정말로 우리는 앙티브에서 지낼 작은 아파트를 찾아 예약했다.


그렇게, 여름휴가는 앙티브였다. 휴가 중에 종종, 산들바람이 볼에 닿는 간질간질함처럼 소근소근 앙티브 여행을 부추기던 여행기들이 떠올랐는데,  글을  사람들의 실제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는 것이 묘하게 우스웠다. 그럼에도, 어떤 이의 이야기가 묻어있는 어떤 장소에서 나는 나의 시선과 나의 마음으로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게 된다는 사실이,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피카소 뮤지엄 정원에 나란히 서있는 동상들의 발에 새겨진, 이름마저 예쁜 마을 ANTI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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