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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Jul 30. 2022

깊은 여행

여행을 대하는 저마다의 방식

분명, 골목길 모퉁이에서 혹은 조그만 광장의 한켠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프렌치 카페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이를테면, 조그마한 테이블마다 그보다 더 작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광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놓여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 동시에 두 의자 사이의 각도는 120도 정도로 마주 보게 맞추어져 있어서 동행자와 적당히 눈을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것. 온갖 종류의 음료를 갖추고 있어서 한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시원한 맥주를 간절히 외치는 순간에도 적당한 타협점이 될 수 있는 것. 또는,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유명한 빵집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닐 텐데도, 적당히 따뜻하면서 버터 풍미 강렬한 크로아상이 1유로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렌치 카페의 커피는 이상할 정도로 맛이 없다. 이른 아침부터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 그들의 문화를 생각하면 이태리 사람들처럼 커피 원두에 집착할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프랑스에서는 입에 착 감기는 달콤 쌉쌀한 커피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인들은 커피의 맛보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카페를 사랑하는 거라고는 하더라만, 기왕이면 맛있는 커피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그래서 프랑스에 갈 때면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식당은 미리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숙소 근처에서 괜찮은 라테류를 마실 수 있는 카페는 꼭 몇 군데 알아봐 둔다. 커피에 진심인 바리스타가 정성껏 라테아트를 만들어주는 곳들은 예의 전형적인 프렌치 카페가 아니라 조그마한 공방 같은 느낌인 경우가 많은데, 그마저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을 거리에 한 두 군데가 전부이다.


그와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생수 한 잔과 커피 두 잔부터 찾는다. 여행 중이라도 오전 시간에는 별다른 일정을 계획하지 않는 편이고, 숙소 근처의 카페에서 천천히 잠을 깨우며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 날 술김에 찍은 엉뚱한 사진들을 보면서 깔깔대기도 하고, 책을 가져가 하루 한 챕터씩 읽기도 하고,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기도 한다. 다행히 숙소가 있는 작은 골목에서 조금 더 큰 골목으로 이어지는 모퉁이에 히피스러운 카페가 위치하고 있어서,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일단 커피부터 마시고 오자!" 하며 게으른 아침을 보낼 수 있었다.


구시가지에서 고소한 라테를 마실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카페였을지도 모르겠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거의 동시에 들이닥치는 손님들 사이에서 묘한 공감대가 느껴졌다. 여기 커피 맛있는 거 알지? 알지! 뭐 그런 눈빛 교환. 아일랜드 출신 아가씨와 호주 출신 아가씨가 생기발랄하면서도 귀여운 영어 액센트로 손님들을 대하는데, 뭉툭한 프랑스식 응대가 아니라서 주문할 때 괜히 긴장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골목으로 내어놓은 테이블들은  종류가 제각각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대여섯 명이 옹기종기 앉을  있을, 치앙마이에서나  법한 스타일의 앉은뱅이 테이블과 벤치가 있고,  반대편 구석에도 낮은 2인용 테이블과 1인용 테이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앞쪽으로 놓인 보통 높이의 테이블에 앉으면서, 내가 혹시나 1인용 자리에 앉은 아가씨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살폈다. 그녀가 계속해서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면서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카페 안쪽을 살펴보는 척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훔쳐보았다. 아하. 그녀는 내가 앉은 앞쪽이 아닌 대각선 건너편 건물의 모서리와 2 높이에 부착되어 있는 가로등을 조그마한 스케치 노트에 담고 있었다. 슥슥슥.


시간이 켜켜이 퇴적되어 있는 구시가지여서일까, 곳곳에서 여행 예술가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쳤다. 유명한 유럽의 광장이나 해변가에 이젤을 세워두고 섬세하게 붓질한 작품들을 그 자리에서 판매하는 생활 예술가들이 아닌, 여행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슥슥 연필로 스케치를 하거나, 일기인지 소설인지 모를 글을 손글씨로 쓰는 여행 예술가들. 그것은 분명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을 농밀하게 만들어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 중의 단상을 그림으로든 글로든 기록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실제 직업이 화가나 작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예술적인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특히 펜으로 꾹꾹 눌러 정성껏 글을 쓰는 이들을 발견할 때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슬그머니 다가가 뒤에서 몰래 훔쳐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혼자 여행을 다닐 때는 나도 가끔씩 글을 썼다. 여행 중에 읽을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를 때면 문구점에도 꼭 들러서 촉감 좋은 펜과 새 노트를 사곤 했다. 카페에서 커피나 와인을 마시는 동안 책을 읽기도 했고, 노트를 꺼내어 글을 쓰기도 했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없어서, 주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것으로 혼자 노는 시간을 채웠다. 그런 여행이 반복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여행 중에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글로 써두고 싶은 감정, 생각, 경험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때도 있었는데, 대체로 그것은 여행 중의 어느 장소를 천천히 깊게 들여다볼 때 생겨났던 것 같다. 두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고 알려진 작은 마을에서 이박 삼일을 보내고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워서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글을 쓰기도 했었고, 관광지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주택가의 골목길을 지도 없이 헤매고 다니던 밤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노트를 꺼내어 끄적였다. 그러니까, 여행 중에 노트를 펼쳐 들게 되는 것은 그 순간에 깊이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여행 예술가를 마주칠 때면 그들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기심으로 힐끔대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그가 나서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가벼운 농담처럼, "완성되면 꼭 보여주세요, 우리,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냥 단순한 골목 스케치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수줍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마저 부러워진 나는, 멋져 보여서 하는 말이라고 응원한다고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두 잔째 커피를 주문하고, 가져간 책을 몇 페이지 읽을 요량으로 펼쳐 들었을 때, 마침 그녀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 테이블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제대로 각 잡고 그린 건 아니고, 그냥 십 분정도 슥슥 그린 거라고 말하면서도 자신 있게 스케치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또 전 날에 그렸다는 알록달록한 성당 건물 스케치를 보여주면서, 아주 색다르고 멋지더라고 우리에게도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성당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어떤 사람들은 건너편에 자리 잡고 앉아 와인을 마시며 글을 쓸 테고, 또 어떤 사람은 카페의 일인용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여행에 깊이를 더한다. 완성작의 작품성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과 그 여행 속의 자신을 추억할 수 있는 메신저로서 그 가치는 이미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뒤 어쩌면 한참 동안은 스케치북을 방치해둘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손때 묻은 스케치북이 눈에 띄어 펼쳐 들었을 때, 그녀는 구시가지에서 가장 맛있었던 커피와 그녀만을 위한 일인용 자리를 추억하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아주 멋진 여행의 방식"이라고 응원하던 어떤 여자를 기억해낼지도 모르겠다.




그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로부터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 꼭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등의 예술적 활동만이 여행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나에겐 없는데 그에게 있는 성향 중의 하나는, 낯선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지나치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 불편했다. 가볍고 자연스러운 짧은 대화일지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 말주변이 없는 나는 대체로 그들을 관찰하기만 했다. 그런 여행에서 돌아온 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낯선 사람들과 나눈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가 여행하는 방식이 좋아졌다. 그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의 십 분짜리 스케치를 실제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상큼 발랄한 카페 직원들이 아일랜드 출신인지 호주 출신인지 그런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내던 숙소를 관리하는 인상 좋은 여인이 동시에 25개의 숙소를 책임지며 일년 중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어 그와 나는 여행 내내 이런저런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런 대화는 때로 한없이 얕기도 했고 때때로 한없이 깊어지기도 했다. 그제야, 내가 여행 중에 글을 쓰지 않아도 그다지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향형 성격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여행에 깊이를 더하는 방식을 조금씩 천천히 익히고 있다. 언젠가는 그보다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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