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드는 단골 식당
아는 교수님이 다음 학기에 안식년을 쓰기로 하셨는데, 잠시 뜸을 들이시고는 비밀을 슬쩍 알려주듯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음식 기행 같은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평생에 한 번은 이태리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봐야지 않나 싶어 졌고, 그래서 안식년이 시작되는 가을에 한 달쯤 이태리에서 머물기로 마음먹었다고. 유기농 장터에서 과일과 채소를 사고, 쿠킹 클라스에 가서 이런저런 지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이태리를 즐기려 한다고.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설렘의 빛이 물들었다. 유럽 여행이 처음도 아닌데 아직 이태리를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지중해 햇살에 제대로 익은 토마토와 정직한 식재료를 사다가 이것저것 요리해 보는 그녀의 한 달 살이가 상상되어서 금세 부러워졌다.
얼마나 멋진가, "난 안식년을 이태리에서 보내기로 했어" 하고 말할 수 있다니. 그녀는 분명 살이 쪄서 돌아올 거라고 말했지만, 아무려면 어때, 근사한 미식 여행의 기념품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지 않나,라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역의 음식을 탐닉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앙티브에서 지냈던 작은 아파트는 올드타운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비교적 세련된, 나름의 고층 빌딩들 사이를 걸어 인포메이션 센터와 노천카페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어쩐지 현대에서 과거로 시공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어서, 매번 설레었다. 첫날에 일찌감치 노천 시장 근처에 커피숍 두 군데를 봐두었던지라,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듯 구시가지로 향했다. 이른 아침, 아직 커피숍과 빵집만 문을 연 구시가지에는 관광객이 없어서 고요했다.
단돈 1유로에 완벽에 가까운 바게트나 크루아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바게트에 신선한 햄과 치즈를 넣은 간단한 샌드위치도 2유로를 내면 거스름돈이 생긴다. 두 잔씩 커피를 마신 뒤에는,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창문마다, 벽마다, 꽃이 흐드러진 앙티브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 끝에 동쪽 지중해 바다가 아침 햇살에 빛나기도 하고, 일찍 장사 준비를 하는 식당 점원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기도 하고, 하품하는 고양이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는 작은 올드타운의 골목길과 친해지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좁은 골목길에 직접 들어가서 조그마한 가게들의 간판을 살피고, 야외 테이블 앞쪽으로 내어놓은 메뉴판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 골목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앙티브 골목 투어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한참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어떤 식재료를 사용해서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살피다 보면 그제야 미슐랭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조그마한, 골목에 내어 놓은 대여섯 테이블이 전부인 소박한 식당이 미슐랭 2 스타라고? 싶은 놀라움이 일지만, 그것도 서너 번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이쯤 되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라서가 아니라 메뉴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저녁 식사 장소를 고르게 된다. 오전의 골목 산책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식당들을 후보에 두고, 오후 내내 "저녁은 어디서 먹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시간을 보낸다. 근처 해변에 걸어가 나른한 낮잠을 청하고, 꼬마 기차를 타고 가서 옆 동네의 해변을 구경하고, 보트를 타고 나가 해변을 반대편에서 바라보기도 하면서, 앙티브에서의 오후는 느릿느릿 흘러간다.
해변에서의 시간이 지루해질 쯤이면 모래를 털어내고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해질 무렵의 구시가지로 다시 걸어갔다. 구시가지에서 꽤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예약도 없이 들어갔다가 빈테이블이 있다며 반겨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근사한 저녁을 먹기도 했고, 구시가지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힙한 레스토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딜 가나 문어 요리는 신선했고, 토마토와 부라타 치즈는 올리브 오일과 후추만 살짝 올렸을 뿐인데 달콤함이 최상이었다. 그리고, 로제 와인.
남부 프랑스에서만 즐길 수 있는 로제와인의 다양함과 풍요로움에 흠뻑 빠져서 매일매일 성실하게 새로운 로제 와인을 탐닉했다. 유난히 맥주가 맛없는 프랑스의 여름이었기에, 타닌 강한 레드 와인보다 훨씬 가볍고 시원한 로제 와인을 물보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아파트 근처의 슈퍼마켓에 가면 로제 와인만으로 한쪽 벽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 앞에서 시간을 잃고 구경하기도 했다. 만원이면 두 세 병도 살 수 있는 로컬 로제 와인을 맛보는 일은, 색과 향이 제각각인 만큼 다양한 재미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앙티브에서 가장 좋았던 저녁 식사를 생각해 보면, 이탈리안 가족이 운영하는 작고 소박한 식당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북적북적한 올드타운에서 몇 블록 벗어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는 식당인데, 골목에는 단 두 개의 야외 테이블만 놓여 있었다. 본인의 아버지가 주방장이고 자신은 서빙을 돕고 있다고 말하는 전형적인 이탈리안 아가씨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프랑스인들은 두 명의 손님을 4인용 테이블에 절대 앉히지 않는데, 그녀는 쿨하게 큰 테이블을 내어주었다. 프랑스어도 이태리어도 할 수 없는 우리는 조심스럽게 영어 메뉴를 요청했고, 영어가 서툰 직원은 식당 안쪽 벽에 걸려 있던 커다란 칠판 메뉴를 가지고 나와서 우리 테이블 앞에 보기 좋게 세워 주었다. 프랑스의 로제 와인 대신에, 이탈리안 레드 와인을 골랐다. 바롤로 지역 와인 한 병이 웬만한 와인바의 하우스 와인 두 잔 가격보다 저렴하다는 것에 먼저 놀라고, 같이 주문한 안티파스토 한 접시에 차곡차곡 쌓인 안주거리가 말도 안 되게 푸짐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시간을 들여 와인 한 병을 비우고 이태리 맥주로 마무리를 하면서, 이따금씩 이탈리안 직원과 담소를 나누었고, 옆 테이블에서 거하게 와인과 음식을 즐기고 있던 독일 청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앙티브에서 일하는 회사 동료라고 했다. 분명 우리는 관광지의 어느 골목에서 관광객으로서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관광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접점을 만드는 짜릿함을 느끼면서, 느긋한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완전히 감동받은 얼굴로 맛있게 싹싹 접시를 비우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탈리안 여직원은 본인의 아버지인 셰프에게 전했다, 이 사람들이 셰프님의 요리에 아주 감동을 받았다고. 잠시 휴식 시간을 즐기러 나온 셰프님은 이탈리아인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해주었다.
본인의 아버지가 요리에 대해서 우직하고도 곧은 정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여직원은 식당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아버지가 직접 관리한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해서 저장했다.
여행 이후에 여행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한 방편으로, 어떻게 쓰는지도 잘 모르는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앙티브를 팔로우했다. 문득문득, 내가 머물렀던 장소들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품고 그들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낯선 사람들의 포스트를 보면서 꿈처럼 아득한 지난여름의 앙티브, 지중해 바닷가와 빼곡히 맛집으로 가득한 골목길을 추억한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누었던 이탈리안 셰프님은 그 날, 식당 건너편 길가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찍은 듯한 사진 한 장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셨다. “어느 저녁을 마무리하는 완벽한 풍경“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그 사진에는 가게의 따뜻한 조명 아래 독일에서 온 청년들과 우리가 저녁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먼 발치에서 담겨있었다. 셰프님의 말처럼 사진은 완벽하게 따사로웠고, 비록 나만 알아볼 수 있을지라도 그 풍경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지금도 종종 인스타그램에서 수줍은 미소를 띠던 이탈리안 셰프님의 사진을 만난다. 제대로 준비한 스테이크나 문어 요리, 혹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푸짐한 식사를 나누어먹는 따뜻한 장면을 보면서 지난여름을 추억한다. 미식 천국 프랑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식당이 이탈리안이라는 것이 조금 우스울지라도, 프렌치 리비에라는 이탈리아 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요리에 진심인 사람을 만나 정직한 맛의 음식을 맛본 감동은 쉽게 잊히지 않기에, 아무려면 어때 하고 생각하기로 한다.
나의 앙티브에는, 영어를 못하지만 요리에 대한 진심만으로 소통하는 이탈리안 셰프님과 그의 딸이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조그마한 선술집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프렌치 식당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와인바가,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노천 카페가 있는, 앙티브는 그야말로 미식가의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