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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윤 Aug 27. 2020

급기야 연기를 배운다

취미가 관객인 사람의 연기 체험기

이 글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D 앞으로 몇 편 더 올라올 예정이에요.

재밌는 취미연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연기를 배워보기로 했다. 작년 봄 정말 좋아하던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그 공연에 출연했던 배우가 강사(이하 호스트)로 있는 모임이었다. 정식 수업도 아니고 인문학을 표방하는 모임 단체에서 만든 기획이었다. 텀블벅 펀딩 홍보를 보게 되었고 일단 신청해봤다. 얼리버드 할인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지른 뒤 결제 날까지 고민을 하기로 했다. 내가 무슨 연기야. 나는 관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펀딩 취소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정확히는 누를 생각도 없었다. 

수업 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수업 전날 카톡 단체방에 초대됐다. 당황스럽게도 정말 배우도 그 공간에 있었다. 항상 배우도 같은 전문직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배우와 대화를 하는 건 정말 사람을 들뜨고 설레게 했다. 


첫 시간 수업을 위한 과제가 있었다. 좋아하는 대사를 골라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대사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의 행복이란 지나간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 하지만 이 가사는 입으로 꺼내면 울 것 같았다. 종종 스스로 다잡기 위해 되뇌는 뮤지컬 사의 찬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주지 않아도 있었다. 하지만 두 가사 모두 뮤지컬 속 넘버의 가사이지 대사는 아니었다. 그럼 무슨 대사를 고르지? 

무슨 심보인지 나는 내가 연뮤덕이란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활발하게 누군가의 시선을 끌만큼 적극적인 참여도 어딘가 쑥스럽고 오글거렸다. 모임에 참여하기로 해놓고 참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그만큼 스스로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 앞에 서서 말하고 난 뒤엔 항상 이불을 차고 스스로가 민망해 뒹굴 정도였으니까. 수업 날까지 제대로 정하지 못하던 나는 결국 뮤지컬도 연극도 아닌 다른 매체의 무난한 대사를 고르기로 했다. 


코이즈미: 쿠로사와 씨는 자주 쓰던데 난 힘내라는 말, 안 좋아해. 힘내, 힘내……. 힘내라는 그 말이 너무 진절머리 나
쿠로사와: 저는 기뻐요 그 말을 들으면 ‘그래, 힘내자!’ 이런 기분이 들어요. 지금 단순하다고 생각했죠?
코이즈미: 아니…….
쿠로사와: 전 유도를 했었는데요. 부상으로 선수를 은퇴하고 함께 훈련했던 동료들이 한동안 제 눈치를 보더라고요. 저를 배려해준다고 할까, 하지만 취직을 하게 되고 만화 편집을 하게 되고, 이번엔 이 일에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말했더니 모두가 저에게 힘내라고 해줬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래서 저는 열심히 해서 지금까지 응원해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코이즈미 씨처럼 힘내라는 말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이 있다면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일본 드라마 <중판출래>의 대사였다. 직업과 가까워 좋아하는 원작의 드라마기도 하고 대사 자체도 맘에 들었다. 이 정도라면 좋아하는 대사라고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적당한 장면을 찾은 것에 가까웠다. 드라마를 재생시키고 대사를 받아 적어 대본 형태로 편집까지 마치니 그럴듯했다. 대사를 소리 내어 읽어야 했지만 마지막 순서만 아니면 좋았다. 결국 내 차례 짧은 대사 소개가 끝나자 질문이 들어왔다. 

"이 대사는 어떤 의미로 고르신 건가요?" 

역시 이 정도론 내가 좋아하는 대사로 보이지 않는 건가 하고 찔렸다. 하필 회사 때문에 시작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을 때 빈자리는 호스트의 옆자리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모임 내내 대사를 적어간 종이로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옆자리라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진 않았겠구나 싶었다. 사실 배우 앞에서 내 존재를 알린 적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쑥스럽고 부끄러웠는지 알 수가 없다. 이상하게 배우는 나와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존재란 느낌이 들었다.


내 대답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힘내'같은 위로하는 말은 정말 좋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것 같다. 누군가를 응원하거나 위로할 때 주의할 지표가 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행히 호스트도 공감한 부분이 많았는지 즉석에서 내가 만들어간 대본 전체를 읽어줬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배우라는 사람들은 처음 본 대본에서 모르는 캐릭터를 바로 표현할 수 있는건가? 드라마 내용을 모르는 호스트가 표현한 캐릭터는 드라마를 모른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힘내'는 위로를 하는 상황과 받는 상황에서 상대에 따라 여러모로 생각해 말해야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른 대사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지나니 금방 두시간이 지났다. 호스트에게 인사하고 나오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내가 방금 전까지 어디 있던건지 꿈결처럼 아련했다. 속마음을 SNS로 써보긴 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왠지 뿌듯하고 민망한 느낌이 간질거리는 첫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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