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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윤 Oct 15. 2020

급기야 연기를 배운다 5

취미가 관객인 사람의 연기 체험기

우리 모임은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었고, 알고 보니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도 많았다. 사실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것은 혼자 즐기기 좋은 취미다. 누구랑 같이 온다고 해도 마주 보는 것이 아니고(일단 인기 있는 극은 연석을 잡기도 힘들다) 앞만 보며 온전히 나와 무대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다. 객석은 어둡고, 무대는 밝기 때문에 주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인지도 알기 힘들다. 옆 사람이 유독 부스럭대고 매너에 어긋나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평화롭고 즐겁게 공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들 공연을 보는 사람이라 그런지 먼저 배려해주고 조용조용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엔 조별 학습 같고 다 같이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지만 자연스럽고 편하게 의견을 나누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직장에서조차 서로 대화한다기보다 윗사람이 명령을 내리는 거에 무한 긍정으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곳에서만큼은 편하게 내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또 그만큼 내 생각만큼 깊게 생각한 누군가의 생각을 주고받는 일이기 때문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럴듯한 의상을 입진 않았지만 소품을 활용하고 가구를 활용했다. 자고 있는 모습은 일부러 누워서 표현할 필요는 없고, 자고 있다는 걸 전달하면 충분했다. 대신 주인공인 조 역할의 사람이 누워있다 발랄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했다. 뒤이어 깨어나 투덜대는 매그인 내가 동생들을 깨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말 단 한 장면만인데, 전체 이야기 중 일부의 일부인 이야기를 표현하면서도 그 짧은 대사들이 막상 시작하려니 생각나지 않았다. 실제 무대에서 실수하는 배우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말만 이어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공연을 이어갔다. 성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대본 한 장에서 출발한 우리의 짧은 공연은 꽤 그럴듯한 장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필 회사 일 때문에 나는 지각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 순서를 맨 뒤로 미루긴 했지만 스스로는 너무 아찔했다. 한편으론 그냥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기뻤다. 첫 시간엔 작은 종이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새 여러 사람 앞에서 짧지만 연기를 해본 사람이 되다니 스스로도 놀랄 발전이었다. 어떤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공간이 자연스러워지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표현하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 마치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회사로 돌아가면 예전의 내가 돌아가 버리지만 , 조금 달라진 나를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기분은 꽤 괜찮았다.


그래서 너무 당연하게 시즌 2까지 신청해버렸다. 정말 매력적인 취미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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