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 한 번 새치 염색을 한다. 평균 염색비 5만 원. 자주하기는 부담스럽고, 집에서 하긴 싫은데 어디 저렴한 데 없나? 하고 착한 업소 리스트를 검색했다.
찾았다.
뿌염 3만 원.
집에서 10분 거리다.
"네. 미용실입니다." 원장님 목소리가 어째 껌 좀 씹으실 것 같은 분위기다.
“새치 뿌리 염색, 지금 가능한가요?"
“아... 좀 있다 나가봐야 하긴 하는데, 얼른 해 드릴게. 오세요오~"
네비를 찍고 찾아 간 미용실은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가게 문 옆, 수돗가엔 뻣뻣한 수건이 잔뜩 널려있고, 카운터 테이블엔 박카스 통에 담긴 고지서 더미가 쌓여 있다. 바닥에 놓인 수박 두 덩어리와 흑염소즙, 양파즙 박스는 읍면 단위 업장의 향취를 더해준다.
"아까 전화하신 분이구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텅빈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사장님이 헐레벌떡 나타나셨다.
"여기 앉으시고. 가운 입으시고.... 어머나! 얼굴이 왜 이래? 기미가 잔뜩 올라왔네. 이거 어쩔 거야? 안 되겠다. 내가 특별히 서비스로 팩 좀 해 드려야겠다."
서글서글한 원장님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다짜고짜 내 허리에 방석을 끼워 목을 뒤로 젖히시더니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게 문질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뒤 이어 빠른 속도로 직접 제조하셨다는 정체불명의 물질을 철썩철썩 발라댔다.
"이거 내가 만든 특수팩인데, 엄청 좋은 재료들이 많이 들어갔어. 18만 원짜리, 20만 원짜리. 비싼 재료 막 넣었어. 하고 나면 다들 깜짝 놀라. 주름이 싹 펴지고, 기미가 바로 옅어지거든. 이거 한 번에 5만 원 받는 건데, 내가 진짜 특별히 해 주는 거예요. 서비스로. 피부를 보니까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 내 성격이 원래 그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입 주변까지 팩이 올라와 나는 뭐라 대꾸도 할 수 없다. 어버버 하고 있는 사이 대형 랩이 내 얼굴을 덮었다. 코와 입까지 모조리. 숨이 막혔다. 공포가 밀려왔다. 죽는거 아닌가 싶은 순간 사장님이 코 부분을 찢어 구멍을 내주셨다. 입부분도 찢어 의사표현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얼굴 이렇게 방치하면 못 써. 관리해야 해. 열 번 끊으면 50만 원인데, 한 번은 서비스로 해 줄께. 지금 하는 건 그냥 해주는 거니까, 총 열두 번이 되는 거지. 내 얼굴 좀 봐봐. 피부 너무 좋죠? 자기도 하고 나면 놀랄걸?"
"아..... 예....."
"새치 염색은 지금보다 어두운 색으로 해야겠는데? 여기랑 여기랑 색깔이 다르잖아. 얼룩져서 너무 지저분하네. 이건 뿌리만 하면 안 되고, 전체적으로 한 번 싸악 해 줘야 돼."
마사지 티켓 권유에 이어, 전체 염색을?
"아니에요. 그냥 뿌리만 해 주세요."
"뿌리만? 얼룩덜룩 할 텐데. 머리가 바래보이고, 실제로도 너무 상했어. 내가 특수약을 좀 써서 깨끗하게 해 줄게요."
"아니에요. 원래 색 맞춰서 뿌리만 해주세요."
친절한 얼굴로 권유하면 잘 뿌리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나름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돈도 돈이지만, 염색은 한 번 어둡게 하면 밝게 되돌리기 힘들다.
원장님의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운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알았어요. 근데 머릿결이 너무 상해 보여서 그냥 염색은 안 되겠어. 내가 특수 클리닉 한 번 해 줄게. 염색이랑 다 해서 1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5만 원에... 싸게."
피곤이 몰려왔다. 그냥 그러자고 했다. 원장님이 그릇에 염색약을 짜서 저으며 다가왔다. 가져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제 말은 그만 걸어줬으면....
"염색할 때 책 읽으면 안 되는데..."
"........ 왜요?"
"염색약이 눈에 엄청 나빠. 이게 눈에는 안 보여도 성분이 다 날아다니거든. 내가 그래서 옛날에 1년 동안 눈이 멀었었잖아. 의사가 그 후로 절대 염색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꼭 나한테 하고 싶다는 손님들이 있으니 안 해 줄 수 있나? 나는 내 손님들한테는 최선을 다하거든."
"눈이 머실 정도였으면, 저는 굳이 안 해주셨어도 되는데요."
"아유. 지금은 나아졌지. 옛날에는 물안경 쓰고 했어요. 얼굴 다 가리는 물안경이 있거든. 그나저나 이거 아무래도 다 발라야겠다. 색이 얼룩덜룩 해져서 못써."
물안경 이야기에 혼이 빠진 사이, 그녀는 염색약을 머리카락 전체에 길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야. 이거 보기보다 숱이 엄청 많네. 내가 약을 꽤 넉넉하게 타는 편인데 아무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거 비싼 약인데... 기분이다. 잠깐만 기다려봐요옹~" 모자란 약을 추가 제조하러 간 사이, 나는 될 대로 돼라 하는 심경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정적 속에서 쓱쓱 약을 바르던 원장님이, 답답한지 다시 말문을 뗐다.
"자요?"
"...... "
"그래. 눈을 감고 있어야 좋아. 거의 다 됐어요. 나도 좀 있다 나가야 하거든. 딸들이랑 서귀포 가기로 해서." 이어지는 원장님의 수다. 큰 딸은 결혼했고, 작은 딸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 친구랑 둘이 살고 있는데, 어찌나 절친인지 제주까지 따라왔다. 딸 친구는 꼭 사내아이 같다. 지금이야 둘이 좋다지만, 한 명이 결혼하고 나면 끈 떨어진 꼴일 텐데, 어쩌려 그러는지 원.
한참 가정사를 터 놓으시던 원장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샴푸대로 이끌었다.
"벌써 감아요?"
"머리가 지금 비상상태라서, 더 하면 머릿결 상해요. 방법이 다 있으니까 일단 가서 앉아봐요."
그녀는 샴푸대에 놓인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빗으로 가르며 염색 상태를 확인했다. 샤워기로 물을 한 번 전체적으로 적시더니 잠시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의 팩을 떼어내고 다시 한번 빳빳한 수건으로 얼굴을 빡빡 문질렀다. 목이 뒤로 꺾인 채로, 나는 명상을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와. 이 피부 좋아진 거 봐라. 거울 보면 깜짝 놀랄걸요?"
그녀는 내 얼굴에 정체 모를 크림을 듬뿍 바르고 마사지 하듯 문질렀다. 그 상태로 머리를 감겼다. 샴푸에 박하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 시원했다. 10만원짜리 특수 샴푸라 했다. 이 가게에는 특수한 제품들이 참 많군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고, 자리로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왜 이리 지칠까?
"아, 거기 말고, 기계 앞에 앉아요. 우린 염색 후엔 드라이 안 해줘. 머릿결 상하니까." 그녀가 가리킨 곳은 헤어 열 처리기. 보통 파마말고 앉아 있는 자리다. 이걸로 머리를 말린다고요?
내가 열을 쪼이고 있는 사이, 그녀는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머리가 많이 상했는데, 단백질 제품 써 봤어요?"
".... 아니요."
"그럼 이거 한 번 발라봐. 이거 쓰면 비싼 클리닉 따로 안 해도 되거든. 7만 원 밖에 안 하는데 조금씩 바르면 1년도 넘게 쓰니까, 훨씬 경제적이지."
"저, 지금 시간이 없는데 그냥 갈게요. 집에 갈 거니까 머리 안 말려도 돼요."
"아, 그래요? 그럼 드라이 조금만 해 줄게. 물을 뚝뚝 흘리면서 가면 되나? 여기 앉아봐요."
할 수 없이 앉았다. 거울 앞에.
헉!
머리카락 전체가 구두약을 바른 듯 시커멓다.
"햇볕 닿으면 점점 밝아져요옹. 걱정 말아용~"
한껏 애교를 섞은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원장님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 났다. 쉴 새 없이 말을 건네시던 분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내 기분을 슬슬 살피시는 눈치다.
밝은 색의 염색약이 없었던 걸까? 그래서, 자꾸 어둡게 해야 한다고, 전체적으로 하자고 고집을 피우셨나? 그래서 드라이 안 해 준다며 거울 앞에도 못 앉게 했나? 속이 상했다. 하지만 따질 용기는 없다. 습관처럼 나는 '기왕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라고 마음먹는다. 그래봤자 머리카락인데...어쨌든 팩도 서비스로 해 주셨는데... 저렇게 살갑게 대하시는데...
"외출하셔야 하는데 제가 시간을 너무 뺏었네요. 이제 됐어요."
내가 불만을 제기하지 않자. 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았다.
"아유. 그래도 손님이 우선이지. 저는 아무리 급해도 성격상 대강하는 법이 없어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니까. 그니까 손님들이 고맙다고, 만원 낼 거 2만 원 내고, 5만 원 낼 거 10만 원도 주고 막 그런다니까. 호호호호...
아, 근데 치약은 뭐 써요? 애터미 들어봤죠? 이건 그냥 치약이 아니라 기능성이거든..."
잠시 방심한 틈에 훅 들어온 2연타.
황급히 일어섰다.
"아, 진짜 가야 해요. 머리는 차에 가면서 말릴게요."
카드를 받아 든 원장님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미셨다. 착한 업소 이용 후기 앱이 열려있다. "여기다가 후기 좀 부탁해요. 요즘은 인터넷에 후기가 중요하다 하대? 서로서로 도와야죵? 머리는 몇 번만 감으면 금세 밝아지니까 걱정 말고!"
나는 사장님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모든 항목에 별 세개 버튼을 눌렀다. 나처럼 별점을 보고 미용실을 예약하게 될 누군가를 위해, 꿋꿋이 별 다섯개를 주지 않는 것.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자 용기였다. 후기란에는 이렇게 썼다. "최선을 다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