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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와이슈팅스타 Feb 26. 2022

지나치게 사과를 잘하는 것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부천에서 하와이로 나의 주거지를 옮기고 나서 남편은 나에게 하나에서 열까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조심해야 할 말을 러주었다. 신혼 여행지에서는 내 영어가 너무 직설적이라며 조언해 첫날부터 부부 싸움을 했고, 백화점에서 쉽게 소셜 넘버를 알려주며 멤버십 카드를 만드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일렀다(이미 만들어 버렸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거의 경고에 가까웠던 말은 아무에게나 '쉽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아라'는 것이었다. 잘못을 했던 안 했던 다짜고짜 'I'm sorry'부터 하지 말라며 남편은 거듭 강조했다. 상대방이 미안해야 할 상황에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버리면, 그것이 온전히 나의 잘못이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가벼운 접촉사고라 할 지라도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100% 나의 실수가 되어버린다나. 듣고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데이트한 것이 열 손가락에 꼽고,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카톡이나 전화가 전부였는데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잘 알아서 한 말일까?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성격인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그 후로도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쇼핑센터에서 "Excuse Me" 대신 "I'm Sorry"가 더 먼저 튀어나왔다. 하와이에서 산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고치지 못한 나의 말버릇. 그러나 내가 내뱉은 수많은 사과는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이기에 상관없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빨리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마음에도 없는 사과들.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지인들과의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친한 친구가 평소와 다를 때의 '싸한 느낌'이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나만 아는 그 이상한 기분. 어릴 때처럼 소리 높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유치하게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차'하는 순간 주고받는 말 수가 줄어들다 연락이 뜸해지는. 며칠 밤 잠을 잘 못 잤다. 아침에 일어나도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몰라서. 분명 나의 행동이나 말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는데 도저히 감이 안 왔다. 단호한 내 말투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기엔 나는 그 친구에게 3년 넘게 단호하게 말한 것 같은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콜백도 없었다. 며칠 뒤 고 참았다가 혹시라도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다는 문자를 남겼다. 그런 거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는데도 또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진짜 사과가 아니다. 조심스러운 말투를 사용했으나,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로 나는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다. 나의 실수를 알아야 다시 반복하지 않을 텐데. 조금 답답하더라도 친구가 마음을 열고 나에게 말해줄 때, 나는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툭'치며 나한테 섭섭한 거 있었어?라고 하거나, 먼저 나서서 차 한잔 하자고 말할 수 있는 넉살이 있으면 좋을 텐데. 친하고 소중한 관계라고 생각하니 더 쉽게 행동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친구와 싸운 여섯 살 딸아이가 생각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딸아이가 일방적으로 친구 마음을 상하게 하고 친구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 어미는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남발해서 문제인데, 딸은 '미안하다'라고 말해야 할 그 타이밍에 자존심을 내세웠다. 내 속도 시끄러웠는데 딸의 교우관계도 삐그덕 거리자 마치 내 인생 자체가 문제처럼 느껴졌다. 우선 아이가 친구에게 사과를 진심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아이를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하다 둘이 진지한 대화를 하면 좋을 것 같아 조용한 카페 겸 레스토랑을 찾았다. 나는 우선 딸의 행동에 과하게 화낸 것을 사과했다. 딸은 덤덤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말하는 도중 눈물이 났다(마흔 넘어 점점 감성이 충만해진다). 그러는 와중에 딸은 배가 고팠는지 주문한 치즈 스파게티를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평소에 잘 안 먹어서 그렇게 잔소리를 했던 아이인데 갑자기 입 맛이 돈 것은 무슨 까닭!). 디저트까지 먹이고 기분 좋게 나오면서 사과는 꼭 했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며칠이 지나 나는 친구가 나에게 섭섭했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그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딸은 아직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과'에 집착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딸의 친구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내 딸이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싶다. "너도 친구가 너를 속상하게 하면 어느 때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괜찮아'라고 대답하지 않는가! 그러니 너의 친구도 너에게 '괜찮아'라고 말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조심스럽게 대본을 외우듯 연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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