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세 명의 딸이 있다. 나는 그중에 첫째 딸이다. 두 동생을 챙기는 것 외에도 어느 모임을 가도 내가 언니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대부분 상황에서 동생들과 함께 하다 보니 언니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친구들끼리 만났을 때, 종종 장난스럽게 친구들이 '나는 네 동생이 아니야'라고 말을 하고서야 그 습관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애어른', '애늙은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어른들 사이에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고, 100% 이해되지는 않아도 어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좋았고, 동생들뿐 아니라 누군가를 챙기는 일이 익숙하고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마음도 이해되고 공감해
나는 언어재활사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주로 만나는 대상자는 아동들이다. 40분 동안 1:1로 아동과 치료를 진행한 후 10분 동안 부모 상담을 진행한다. 아직 나는 부모님의 입장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을 위해 책이나 영상 등 간접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동생들을 돌볼 기회도 많았고, 지금도 엄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지낸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어렴풋이 느껴진다. 물론 엄마의 마음을 똑같이 느낀다고 할 수는 없다. 여러 경험들 속에서 느낀 마음들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
상담을 하면서 어머니들께 "집에서 사실 아이랑 이야기하고 놀기 생각보다 어려우시죠. 그렇지만 하루에 10분 정도라도 아이와 상호작용 해주세요, 놀아주세요, 이야기를 나눠주세요."라고 말씀드린다.
나는 아이가 없는데 집에서 아이랑 놀고 이야기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걸 어떻게 알까?
(이런 공감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겪지도 않을걸 어떻게 공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피곤한 상태였다. 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생각보다 듣고 있는 것이 어려웠다. (동생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집중해서 들어주지 못했다. 조금은 형식적인 대답을 하면서 듣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고, 중간에 의견이 필요한 경우 다시 내용을 되물어보기도 했었다. 이때, 나는 경청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경청이 어렵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아, 엄마도 퇴근하고 왔을 때 내가 옆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쉽지 않았겠구나'.이후로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이 되어, 어머니들께도 꼭 공감하며 말씀드렸다.
그렇지만 나는 딸이야
성인이 된 지금도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을 엄마에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고 있거나 뉴스를 보고 있더라도 옆에 가서 재잘재잘 이야기한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의 반응에 속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옆에서 이야기를 해도 듣고 있다는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다가 '아 지금 내 말을 안 듣고 있구나.'라고 느껴졌을 때, 내 마음이 확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니 서운하고 속상한 느낌?(언어발달 시기에 아동의 말에 잘 반응해야 하는 이유를 몸소 깨달은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엄마가 바쁘고 피곤해서 듣기 힘들겠구나'라고 엄마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이기적 이게도 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은 후 한동안은 이야기를 최대한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