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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명 Jun 20. 2020

예술가의 공간

1. 예술가와 창작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창작물로 표현하는 존재이다. 때로는 밥을 굶더라도 창작열을 불태워야만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예술가에게 창작작업은 ‘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창작을 하지 않는 예술가를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미루더라도, 적어도 예술가에게 지속적인 창작을 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임에는 분명하다.


  창작의 형태는 다양하다. 쉽게 구분하자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있다. 유형을 창작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미술이다. 그림을 비롯해 조각, 서예, 의상디자인, 시각디자인 등, 점,선,면을 활용한 창작물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와 창작’에 대한 보다 명확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세밀하게 들어가자면 끝도 없지만, 창작을 준비하는 단계와 창작이 진행되는 단계, 그리고 창작이 완성되고 보관되는 단계로 나눈다면 창작의 결과물에 필요한 환경이 어떨지 가늠할 수 있다.


  ‘무형’의 창작을 하는 예술분야는 ‘유형’과 판이하게 다른 조건을 갖고 있다. 이른바 ‘소리’로 창작을 하는 음악과 ‘사유’의 결과물을 글로 표현하는 문학이 있고, 그 외에도 ‘맛’을 ‘창작’하는 음식 분야가 있다. 음식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맛’과 ‘향(냄새)’이 본질인 무형의 예술분야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들에게 필요한 창작환경은 각각의 분야를 이루는 핵심적인 본질(소리, 사유, 맛, 냄새 등)을 파악한다면 적절한 환경 조건을 조성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창작은 곧 존재의 증명 과정이고, 창작물은 그 증거이다. 이것을 잘 돕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창작이 곧 매출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존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언제나 고민과 사유를 놓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환경조성은 성과를 위한 껍데기를 만들고 도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허름하고, 소박하더라도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 그곳에는 ‘도움’이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무안한 영역이다. 모든 것은 ‘공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본질은 존재의 가치를 얼마만큼 진실 되게 표현해내느냐에 있다. 여기에서 열외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대중예술’이겠다. 이 또한 예술분야로 포함하고 싶다. 다만, 대중을 통한 ‘인기와 수익’을 전제로 한 분야인 만큼, 창작에 대한, 또 예술가(아티스트)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나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예술가와 공간 

  예술가에게 공간은 필수적이다. 가장 기본적인 주거공간에서 조차 창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공간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분야에 따라 더 많이 혹은 덜 필요하기도 하다.


  먼저 주거공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거공간에서부터 창작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빼놓고 예술가를 위한, 예술을 위한 창작공간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일례로 나의 스승인 한 판소리 명창은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낮은 음의 ‘구음(목소리)’으로 목을 푼다. 평생을 그리 살아오셨다고 한다. 일상의 시작이 ‘소리를 가다듬는 것’이라고 하니, 주거공간이 곧 창작공간이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본격적인 창작공간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주거와 창작 공간의 구분과 공존에 대한 생각이 들 수 있겠다. 이는 어느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한 생각보다, 분야와 개인의 특성 또는 성향(혹 취향)에 따라 갈리기 때문에, ‘다양성’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면 적합할 듯하다.


  주거의 공간에서 일상과 함께 창작 또는 창작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면, 창작공간은 잠시 동안 일상과 분리된 예술가로서 고도의 집중을 이끌어내 주는, 또는 깊은 평안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장소이다. 또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에너지를 마음껏, 정말 마음껏 쏟아 놓을 수 있는 장소여야 할 것이다. 필자가 예술가로서 예술 못지않게 예술가, 그리고 예술 공간에 집중하는 이유는, 누구나 다 어려운 환경에서 예술을 했고, 모두 다 갖추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창작을 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자본과 부동산(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한 명의 예술가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영위하느냐, 포기하느냐가 갈리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불평등, 불공평의 부정적인 의식을 예술가에게 심어줄 수밖에 없는 아주 안타까운 시대임을 이야기한다. 어린시절부터 예술중학교, 예술고등학교를 거쳐 예술대학에 이르기까지, 비교하고 경쟁하며, 소숫점까지 난도질 당하는 자신의 예술을 대면한 채 청소년기를 보낸다. 무용계는 어떤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복도 벽을 따라, 매주-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전교생 앞에 공개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결국, 피해의식과 자책에 사로잡혀 ‘존재의 가능성’은 거세당한 채, 틀에 박힌 예술(이라고도 말 할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기준에 맞춘 어느 영역에 안착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주 순화해서 표현한다면 말이다.


 물론, ‘빈부의 격차’는 예술세계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내면의 빈곤과 상처로 뒤덮힌 자존감을 가진 존재라면 아무리 보석을 품고 있는 예술가라 할지라도 결국, 빛을 발하기엔 터무니없이 역부족이다.


  이 이야기가 ‘공간’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아주 밀접하다고 본다. 나 또한 연습실을 유지하다가 주거공간의 월세와 창작공간의 월세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창작공간을 포기한 채 일상도 창작도 아닌 형태의 삶을 수년째 살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자책하거나 환경탓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 안에서 나름의 방법과 해법을 찾아가는 중이지만, 모든 예술가에게 나와 같은 야생의 삶을 추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삶을 영위할만한 정도의 예술가들은 또 다른 예술가의 창작공간을 통해 본인의 예술활동 외의 ‘부수적인’ 수익구조를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두 명의 연주자가 겨우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작은 부스 하나에 40만원~50만원을 월세로 받으며, 지하에 다닥다닥 연이어 놓인 부스로 수익을 올리는 ‘연습실(레슨실)사업’이 예술의 전당 근처, 사당동, 방배동, 또 예술중고등학교 근처에 흔하게 일어난다. 이마저도 ‘예약대기자’가 언제나 꽉 차있어 창작공간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마지막으로, 예술가의 공간은 창작물과 감상자(대중)을 연결해주는 무대, 갤러리 등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이 또한 주거공간이 될 수도 있고(하우스 콘서트), 창작공간이 될 수 있다(미술작가의 작업실을 갤러리로 활용하는 ‘쇼룸’). 보다 전문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연장’ 혹은 ‘전시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 이러한 공간은 꽤 많다. 하지만 이 또한 보이지 않는 ‘급’이 존재하기에 결국 ‘대관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거나, 사전에 대관일정을 알 수 있는 연줄이 있는 사람에게 분명한 우선권이 가기 마련이다.


  때문에 공간의 인지도나 규모보다, ‘한명의 예술가가 창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담긴 곳이었으면 바랄게 없겠다. 그렇다면 그런 공간의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3. 예술가의 공간 

  예술가의 공간을 기획함에 있어서는 예술가 자신의 창작자로서의 성장과 컨디션 관리를 위한 주거, 학습, 창작, 관계 등을 위한 조건과 각 분야별 창작 형태 및 창작물의 유통경로(대중과의 만남 또는 판매 등의 행위), 그리고 동료 또는 연관된 예술가와의 교류 등을 고려할 수 있겠다.


  예컨대, 연주활동이 주를 이루는 음악가의 경우, 창작자의 연마(연습, 작곡, 녹음 등)를 위해서는 주변과 단절(외부 소리가 들어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리가 노출되지 않는)된 방음공간이 필수요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음향적인 부분인데, 공간의 울림이 전혀 없는 방음공간에서는 연습효과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적당한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려운 과제이다. 또한, 연주활동을 하는 무대 또는 공연장소 혹은 수업장소 등과의 지리적인 효율성(거리, 교통편 등)도 중요하다. 자차(자가용)가 없는 대다수의 예술가는 고가의 혹은 무거운 악기를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리적 요건이 너무 열악한 경우, 체력적인 문제로 정작 창작행위에 필요한 집중력을 소모하기 마련이다. 더불어, 혼자 연주하는 경우보다 앙상블(중주 또는 합주)을 하는 일이 많다보니 동료 예술가들과 교류하기에도 쾌적한 공간이라면 더불어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미술분야는 어떨까. 아마도 창작자 자신의 작업을 위한 소음관리, 공간의 높낮이, 습도, 온도 등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작품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대부분 십수년에서 수십여년 활동한 미술가의 경우 작품을 보관하는 공간을 유지하는데 애를 먹곤 한다. 땅값이 저렴한 곳에 창고를 둔다 해도, 정기적인 관리가 어렵고, 같은 곳에 작업실을 둔다면, 메인스트림(도시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야할 시기에 은둔형 예술가로 살아가야할 여지도 있다. 

  무용도 빼놓을 수 없다. 전면 거울이 있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마음껏 뛸 수 있는 공간을 소유한 무용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중소 무용단이라도 들어가서 무용단 연습실을 사용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개인무용수로서의 독창성을 기르기에는 공간을 소유한 혹은 공간 사용이 용이한 무용수를 따라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용은 다른 분야보다 공간의 높이와 넓이에 영향을 받을 듯하다. 이 또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혼자 또는 여럿이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 또는 호환이 가능한 공간적 요소가 허락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맨발로 연습하는 무용수가 많고,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분야도 있기 때문에 바닥재라던지, 방음에 대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신경써야 하는 조건이다.


  이 외에도 분야별 특성이 있겠지만, 25년차 해금연주자인 내게 그 이상의 전문지식은 무리인 듯하다. 몇가지 더 보태자면, 자신의 창작 작업물 또는 그 과정을 다시 확인해볼 수 있는 기본적인 녹음 및 녹화장비가 구비된 공간이면 장비를 소유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크지 않아도 적당한 무대(연습 공간과 구분된 –약간 높은 턱 위에 있는- 공간)가 있고, 최소한의 조명이 있다면, 무대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없는 예술가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실력향상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줄 것이다.


  주차공간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연주자와 호흡을 맞추려고 연습장소를 찾다보면 주차 문제 때문에 악기를 운반해야하는 연주자와의 연습에 제약이 많이 따른다. 악기가 이동할 동선을 고려해, 출입구와 주차장의 거리(지하 주차장-엘리베이터가 가장 이상적)가 가까울수록 창작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4. 공간이 지닌 정체성과 창작작업

  개인적으로는 위에 열거한 다양한 경우의 조건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정체성’이다. 가장 중요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간(장소)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창작공간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공간의 정체성은 창작 작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창작자에 대한 배려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리고 창작자가 그 공간에 머무는 시간동안 자연스럽게 배어짐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공간이 주는 힘’이다.


  얼마 전, 서촌의 ‘홍건익 가옥’이라는 공간에서 하루정도 머물며 공간 안에서의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 레지던시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전통음악을 하는 터라, 전통의 공간에서 머문다고 생각하니 그냥 갈 수가 없어, 해금과 한복을 챙겨갔다. 모처럼 한옥에 앉아 옛 선조들이 연주했던 풍류음악을 복식을 갖추고 연주하고 있노라니, 시멘트 건물 안에서 연주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감동을 체험했다.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예술경험이라면 단연, 그곳에서의 하루를 꼽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 이유에 대해 오랜시간 고민했다. 아직까지도 확고한 답은 ‘공간이 주는 힘’이다. 조선 후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옥 안에 흐르는 공기는 예술가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로 인도한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공간에서만 느껴지는 무엇이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프랑스를 비롯, 러시아 등 유럽국가에는 ‘예술가의 집’이란 곳이 있다. 예술가에게 짧게는 5년 길게는 평생 공간을 내주어 창작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없도록 돕는 제도인데, 공간에 대한 에너지를 아끼는 것만 해도 한사람의 예술가가 얻게 되는 창작기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은 ‘시간’과 맞물려있다. 공간의 조건이 좋아질수록, 창작에 할애할 시간이 늘어날 것이고, 자연스럽게 창작물의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의 예술성을 깊이 있게 해주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예술가 개인의 한계 또는 여타한 이유로 그 가능성을 일깨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길게 보자면, 수많은 시간이 공간에 흐를수록, 또 애정과 고민이 깊이가 더할수록 그곳에서는 진정한 예술이 오래도록 꽃피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예술에, 예술과 예술가를 위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일이 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알고 높이는데 시간과 물질과 애정을 쏟는 모든 분들의 배려와 손길에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예술은 조건을 걸어 이용하려는 순간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위해 정성을 모은다면, 빛난 보석같이 세상을 밝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9.7.6. 建命

*참고영상 : [설탕한스푼] 예술가 인터뷰 4부작 - '예술가의 공간'(종합편) 

예술가에게 공간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에게 자신만의 공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해금연주자 이승희 교수, 평면예술가 신상원 작가, 플루티스트이자 로로스페이스 공간 운영자인 이민희 대표 그리고 예술정책연구원 이정희 박사까지-. 예술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공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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