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동물인지라 고유의 체취가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어렸을 때에는 사람마다 고유의 향기가 있었던 것도 같다. 1980년대... 그 시절엔 옷 세탁은 빨랫비누로 했고, 어지간해선 섬유유연제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쓸 수 있는 샴푸도 몇 가지 없었고, 로션은... 친구들 대부분이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발랐었다.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도... 대학에 와서나 처음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향기가 돈이 되지 않았던 시대, 인공적인 향을 많이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 덕분이었을지도...
어쨌든, 공공도서관 자료실들도 고유의 향기를 갖고 있다. 어린이자료실과 성인자료실에서 나는 향기가 다르고, 디지털자료실 또한 독특한 향기를 갖고 있다. 향기라고 하는 게 맞을까... 내가 근무해 본 공공도서관의 디지털자료실은 특이한 냄새가 났다. 토너냄새, 정전기냄새(?), 쿰쿰한 사람냄새 등... 이 모든 냄새들은 디지털자료실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디지털자료실 담당자는 다음과 같은 일을 수행한다.
- 디지털 자료실 기기(컴퓨터, 프린터 등) 관리
- 홈페이지 운영 및 콘텐츠 관리
- 비도서(DVD, CD), OTT 구독
- 정기간행물(잡지, 신문) 관리 및 대출, 반납
데스크톱 컴퓨터가 20대 이상 가동되고 있으니, 금속 전자제품에서 내뿜는 특이한 냄새가 디지털자료실에 가득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자료실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물자료는 DVD, CD, 잡지, 신문이 전부인데, 그 때문에 일반적인 책냄새는 디지털자료실에 없다. 대신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 아주 예민하거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들...
디지털자료실 담당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업무의 특성과 그에 따른 난이도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용자, 바로 사람이다. 디지털자료실의 장단점 또한 이용자들의 특성으로 인해 생겨난다.
만약에 당신이 디지털자료실에서 일하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조용히 일할 수 있다.
디지털자료실 이용자들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조용한 곳을 선호한다. 조용히 컴퓨터 쿨링팬 돌아가는 소리, 조용히 타자 치는 소리만이 디지털자료실의 백색소음으로 존재할 자격이 있다. 이용자들이 조용하니 질문도 많지 않다. 하루 종일 조용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몸이 편하다.
디지털자료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잡지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 늘 사용하는 컴퓨터와 늘 보는 잡지가 정해져 있는 단골고객들... 그런 고객들 덕분에 공간이 어질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육체노동이 거의 없다.
그런데 또 만약에 당신이 디지털자료실에서 일하게 된다면,
소음에 대한 강박이 생길 수 있다.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용자들은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발생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뮤지컬 공연장에서 시체처럼 조용히 관람하는 것을 일컬어 시체관극이라고 하던가... 디지털자료실에도 시체근무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업무전화도 조용히, 프린트도 나눠서, 이용자 질문에도 조용히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용자들은 참지 않는다.
또한 답답한 공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디지털자료실은 공기가 매우 답답하다. 컴퓨터 쿨링팬에서 내뿜는 답답한 공기, 다양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내뿜는 날숨, 그리고 노숙자들의 존재감이 버무려져 디지털자료실을 가득 채운다. 방향제도 써 보고, 환기도 자주 시켜보지만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분마저 가라앉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매일 만나는 양극단의 사람들 사이에서 지쳐간다.
"예민한 사람들"과 "이러나저러나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노숙자)"을 매일 만나야 한다. 그래서 문제다. 노숙자를 매일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다. 다들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갖고 있겠지만 디지털자료실 근무자가 보는 그들의 현재 모습은 어쩐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 아까운 시간을 왜 저렇게 흘려보내고 있을까... 컴퓨터 앞에서 코를 골며 자기도, 하루 종일 유튜브만 보기도 하고, 대하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다양하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노숙자들의 행동이 예민한 분들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이고, 예민한 분들은 사서에게 지도를 부탁한다는 것이며, 사서는 민폐를 끼치는 사람에게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민폐쟁이들의 문제행동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비극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매일 같은 공간에서 마주친다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민원 싸움, 두 그룹의 등쌀에 사서는 피곤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디지털자료실에서 근무하는 사서는
차분하고 세심한 사람이면 좋겠다.
섬세하고 예민한 디지털자료실 이용자들을 위해 작은 부분마저도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한창 일할 나이에 옛날 대하드라마, 유튜브를 보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에게 친절한 응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공도서관 사서는 모든 시민에게 친절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사람보다는 타인을 존중하고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면 좋겠다.
ISFJ: 용감한 수호자, 실용적인 조력가
결론적으로 디지털자료실 사서는 ISFJ 유형의 사람에게 적합할 것 같다. 이 성향의 사람들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타인을 향한 연민과 동정심이 있다고 하던데, 디지털자료실에서 근무한다면 예민하고 안쓰러운 이용자들을 조용하고 차분히 배려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추가적으로...후각이 덜 발달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자료실 업무의 부문별 지수>
사서지수 ★★☆☆☆
민원접점지수 ★★★★☆
야근유발지수 ☆☆☆☆☆
직무스트레스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