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직장에서 40대 중반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학벌이니 스펙이니… 그딴 거 40대 넘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야.결국 다 그냥 ‘아저씨’로 평준화되는 거야.”
그땐 웃었습니다. 아직 마흔이 되기 전이었으니까요.
스무 살 끝자락, 대학 졸업장을 들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날. 그때 우리는 이 사회에 막 출고된 상품이었습니다.
학벌은 원산지 라벨, 스펙은 포장지.‘Made in 서울대’, ‘Made in 지방대’, ‘Made in 해외파’
그 작은 라벨 하나가 인생의 등급표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무섭습니다.
직장에 적응하고, 가정을 꾸리며 정신없이 살다 보면
라벨의 글씨는 바래지고,
포장지는 서서히 벗겨져 버립니다.
그리고 거울 속 낯선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합니다.
40대가 되면, 학벌도 스펙도 아닌, 그저 이름 모를 ‘아저씨’ 중 하나가 됩니다.
이른바 ‘남자의 평준화’, ‘아저씨’.
때로는 씁쓸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이 홀가분해지기도 합니다.
빠릿함 대신 무던함,날카로운 야망 대신 둥글둥글한 체념이 묻어나는 ‘아저씨’.
야망이 빠져나간 자리는 휴대폰 속 유튜브 채널과 주식 같은 재테크 앱이 대신 채우고,
소소한 위안과 실망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간혹 만나는 친구들과는 새로운 라벨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디 사는지?”, “아파트는 몇 평인지?”, “재테크는 무엇으로 하는지?” 이제는 명함에 붙은 회사 로고보다
등기부등본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내 집값이 내 인생의 이력서가 된 나이.
씁쓸합니다.
나이의 평준화는 이뤘지만, 또 다른 꼬리표가 달린 지금,
문득 떠오르는 옛말 하나.
돈이 많아도 욕심 가득한 얼굴보다는 인자함이 묻어나는 얼굴이 더 오래 기억된다고 합니다.
늘 의심 어린 눈초리로 상대를 바라보는 얼굴보다도 말이죠.
특별한 꾸밈이나 포장 없이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가장 빛나는 경쟁력이 되는 나이,
바로 ‘아저씨’의 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마치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그 따스하고 인자한 아저씨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