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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성(tropism)을 넘어

by 또 하나의 문화

향성(tropism)을 넘어

반하라,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프랑스 거주


폴 토마스 앤더슨(PTA)은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의 주요 여성인물을 흑인 무장 혁명가로 바꿔 인종/젠더 관계구성을 흥미롭게 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만들었다. 트럼프 정권과 유착된 백인우월주의와 이민자 억압에 대한 비판을 희화적 오락물(백인 우월주의자 남성이 흑인여성에게 ‘역강간’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식의...)로 만들어 관객에 다가가는 접근성도 확보하고 Gen Z 흑백 ‘혼혈’소녀를 희망의 주체로 전망하면서 헐리우드식 PC 문법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고려해서 맞춘 그 ‘문법’에도 불구하고 주류 백인남성이 흑인여성을 대해 온 ‘향성’(굴성)이 당혹스럽게 확연했다.


1984년 보수로 전회한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무장혁명에 나선 여주인공 ‘퍼피디아’ 캐릭터를 보면 그보다 한 20년 전 이후 활동했던 ‘블랙팬서’당의 여성전사들이 떠오른다. (블랙팬서당은 미국 국내안보의 최대위협으로 규정되어 FBI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죽음의 두려움에 포획되어 자정능력을 상실한 남성팬서들의 성차별적 폭력과 도덕적 몰락으로 붕괴했다.) 특히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물론 지성과 관능을 무기로 블랙팬서 당의 당수(1974-1977)가 되어 탁월한 지도력을 증명했던 일레인 브라운의 급진적 활동은 PTA가 ‘퍼피디아’를 구상하는데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다. (성차별적 폭력의 위협때문에 당을 떠나게 된 시점까지의 한 흑인여성 이야기, 일레인 브라운의 <A Taste of Power>는 1992년 출판되었고, 흥미롭게도 일레인이 헐리우드의 흑인 재현을 비판하는 수년 전 동영상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흑인 재현의 문제를 비판한 일레인 브라운의 목소리를 무시한 PTA는, 젊고 아름다운 흑인여성 혁명가들이 분출했던 관능적 이미지를 착취해서 퍼피디아를 만들면서 흑인여성 혁명가들의 실천이 흑인 커뮤니티에 남긴 탁월한 유산을 지워버렸다. 동지들을 배반하고 자신의 아기도 버렸던 퍼피디아, 범행의 대가를 치루도록 숨어 살아가는 급진적 행동파 흑인여성 퍼피디아는 실제의 흑인 여성혁명가들의 삶과 정반대로 부정적이다. 블랙팬서 급진 여성들은 FBI와 갱단에 의해 살해되거나 사고를 달고다니는 남성 팬서들을 대신해서 당을 맡아 재정을 확보하고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함께 돌보며 무상급식, 무상의료와 교통 서비스를 커뮤니티에 제공하며 당의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폭력적인 성차별적 위협으로 인해 당을 떠난 일레인 브라운은 독자적으로 조직들을 만들어 81세가 되는 오늘날에도 평생 흑인여성들과 아이들, 투옥되는 청소년들을 돕는 사회활동을 해왔고 최근엔 그들을 위한 주거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급진적 흑인 여성혁명가들은 과거의 실패에 머물러 숨어사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뿌리를 내린 페미니스트가 되어 평생에 걸친 사회활동으로 커뮤니티에 유산을 쌓고 있는데, 이들의 급진적 에너지와 관능적 이미지를 착취해서 그들이 연상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PTA의 퍼피디아의 부정적 이미지의 전파는 일레인과 같은 급진적 흑인여성 활동가들의 존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류 ‘백인남성’의 익숙한 폭력의 반복으로 여겨질 것이다. .


신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탈리 샤로트의 향성(Tropism 1939)은 나뭇잎이 햇빛을 향하는 생물학적인 반응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향성’을 스케치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여성을 대해온 백인남성들의 ‘향성’은 PTA의 퍼피디아 재현과 무관할 수 없다. 개인 각자의 ‘향성’을 감각하고 그 굴성을 꺽는 페미니스트의 통과의례가 PTA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202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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