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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Apr 22. 2020

멀리 봐. 눈앞만 보지 말고.

# 인생 짧지만 길어

인생이 너무 아득해서 한걸음 앞도 내다보기 힘든 순간이 있었다. 한걸음 앞이 아니라 지금 이 걸음을 끝으로 주저앉아 버릴지 고민하는 그런 순간이.


고개를 들어 저만치 앞을 보는 것이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냥 두 눈을 꾹 감아버리고 싶은 그런 순간이.



나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버텨냈다. 겨우 겨우 버텨냈다. 삶을 놔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괴로웠다. 


꽃을 볼 때 기뻤지만 괴로웠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즐거웠지만 괴로웠고, 연인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행복했지만 괴로웠다. 


모든 감정의 끝은 괴로움이었다. 

 



눈이 떠진 탓에 그냥 하루를 살았다. 차라리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일어나고 싶지 않았던 순간도 많았고, 눈만 뜬 채 울고 있던 날들도 많았다. 


내게 미래를 그려가는 것은 너무 큰 사치였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내가 너무 눈 앞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오늘, 당장 이번 달, 당장 올해. 뭐든 당장 이루어 내고 싶었고 빨리 결과를 얻고 싶었다. 




그런 조급함이 계속해서 나를 늪에 빠트리고 있었다.


허우적 댈수록 늪에 빨리 빠지고 헤어날 수 없듯, 내 마음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나아가려는 방향은 있었을까?


차근차근 한 발을 내디뎠어도 되었을 날들을 나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조금 멀리 봤더라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눈앞 눈앞 눈앞만 보니 눈앞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 눈앞에 보이는 작은 웅덩이 하나가 너무 두려워 나는 다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 절망이었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아등바등하는 나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삶이 나아가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비로소 내가 서 있었던 곳이 그리고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선명하게 보였다. 고개를 들어 저만치 앞을 보았을 때, 사방팔방을 빙 둘러 보고서야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눈 앞에 놓인 작은 돌멩이나 웅덩이가 아니라 저만치 나있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내 느린 걸음으로 저 길을 걸어가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 길을 내달릴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데, 천리길을 순식간에 지나가려 했기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나 보다.



나는 이제 느린 걸음을 시작하고자 한다. 언젠가 돌아보면 지금이 첫걸음을 내딛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또 주저앉고 싶은 날이 올 테고, 너무 힘들어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을 테고, 후회와 아쉬음으로 고개 숙이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눈 앞만 보고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 눈앞이 아니라 긴 길의 끝에 내가 이르고 싶은 곳을 보며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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