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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순 Sep 15. 2020

길가에 앉아있는 노인을 본 적이 있나요?

72살 연하 손녀와 외할머니의 여름 나기

  약속할 때면 가장 처음과 끝에 있는 새끼손가락을 꼬아 맹세한다. 우리 외할머니는 내가 쉽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지 못하는 분이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낳은 칠 남매 중 막내딸의 둘째 손녀였고, 우리 사이에는 칠십 년의 세월이 있었다. 끝과 끝의 손가락이지만 무언가 약속할 수 없는 사이. 


  내가 할머니께 “할머니, 꼭 건강하셔야 해요.” 하면 “이제 곧 죽어야지.” 하고 대답하셨다. 어릴 때부터 말버릇처럼 반복하는 할머니의 말. ‘죽을 때가 다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할머니는 아흔일곱이 되신 지금까지 정정하시다. 외삼촌댁에 계시던 할머니는 작년 여름 한 계절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하셨고, 우리는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나의 첫 기억 속에서도 이미 허리가 많이 굽어있었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한결같다고 생각해왔는데, 굽은 허리로 동네 앞 슈퍼를 거뜬히 다녀오셨던 할머니가 어느새 열 걸음도 걷기 힘들어졌다는 걸 알았다. 


  하루는 칼국수를 먹으러 동네 식당에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쉬었다 가자’며 자꾸 아파트 화단에 있는 큰 돌마다 앉아 쉬셨다. 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거의 한 시간에 걸쳐 갔다. 그런 할머니의 휴식을 기다리는데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파트 벤치나 돌 위에 앉아 쉬는 노인들. 나는 그분들이 바람 쐬려고 나와 계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쉼이 필요해서 앉아 계셨던 걸까. 무심코 지나치는 벤치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노약자 석이었구나.


  여름은 점점 더 익어가고, 엄마는 외할머니와 서산 이모 댁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며 가는 길에 당진 왜목마을에 들렀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나, 셋이서 흔들의자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늘의 오른쪽 구석에 하얀 낮달이 크게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 하얀 달이 떴어요! 저기 보이세요?’ 하면서 가리켰다. 할머니는 천천히, 그리고 유심히 낮달을 찾다가 내 손가락 끝에 달린 꽃잎 같은 달을 발견하셨는지, ‘흰 달이네! 예뻐라.’ 하며 손뼉을 치셨다. 


  아흔여섯, 삶의 모든 장면에 무던할 거라 생각했던 할머니가 하얀 조각 달 하나에 손뼉을 치며 좋아하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제 하얀 달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나겠구나. 그건 나와 할머니 사이의 새로운 추억이었고 하얀 달을 보면 행복해하시던 할머니를 떠올리겠다는 나만의 약속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이모 댁에서 한 이불을 펴고 함께 잤다. 어스름한 아침에 인기척이 들려 부스스 깨었는데 할머니가 깨어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자는데 뭐가 치르르르 해서 보니까 지네가 있었어,’라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엄마를 깨웠다. 할머니는 손가락만 한 지네가 베개 맡을 치르르하면서 지나더니 장롱 밑으로 들어갔나,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나,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엄청 커. 무서워. 깨물릴까 봐 무서웠어.’ 하시는데, 그런 할머니가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도 지네를 무서워하시는구나. 나도 다리 많은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엄마는 벌레가 나왔다고 하면 휴지로 척척 잡아 버리기에 좀 더 나이가 들면 벌레 따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할머니를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도 아흔여섯 살이 되더라도 지네는 무서워할 것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무뼈 닭발을 먹었다. 엄청나게 매웠는데 할머니는 잘도 드셨다. ‘할머니, 안 매워요?’ 하면 ‘먹을 만 해,’ 하셨다. 엄마는 옆에서 수박을 잘랐다. 씨가 많은 수박이었다. 그걸 보며 닭발을 씹다 작은 뼛조각이 씹혔다. 할머니께 ‘작은 뼈가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씨가 있어요.’라고 잘못 말했다. 그러다 문득 씨와 뼈가 한 굴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생명의 처음은 씨가 되고, 어떤 생명의 끝은 뼈가 되니, 그 굴레는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었다. 


  한여름을 보내는 동안 할머니와 나는 칠십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둔 노인과 청년이 아닌, 흰 낮달을 좋아하고 지네를 무서워하는 같은 핏줄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아흔여섯의 한 노인을 이해하게 될 때, 세상에 놓인 아파트 화단의 커다란 돌과 막 떠오른 커다랗고 하얀 달, 그리고 그 여름의 식탁이 모두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늦여름, 할머니가 다시 외삼촌댁으로 가실 때, 나는 할머니의 새끼손가락 꼭 잡고 약속했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할머니는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잡으며 ‘아이고, 그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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