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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순 Sep 16. 2020

뭘 해도 안 되는 날에 다치기까지 했다.

상처가 생긴 날마다 생각나는 나의 일기

  누구나 그런 날이 있다. 무기력하고 자꾸 실수하게 되고 집중도 되지 않아서 결국엔 다치기까지 하는 최악의 날. 종종 그런 날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문득 '예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는데...' 하고 다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일어나서 일기를 써두었다. 


아래는 그때 생각났던 다친 날의 이야기이다. (주의 : 유치하고 한심할 수 있음)


  대학 2학년 때, 나는 타 캠퍼스 전공을 복수전공을 시도했다. 아침 일찍 다른 지역에 있는 캠퍼스에 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학교에 도착하면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 하루를 보냈다. 혼자 먹는 밥은 모래를 삼키듯이 느껴졌고, 혼자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것이 어색해서 자주 발이 꼬였다. 


  지금은 혼자 잘만 다니지만, 그때는 본 캠퍼스에서 친구들이랑 다니다가 혼자 다니려니 적응이 안 되었다. 3월 즈음이었는데 날씨도 우중충했고 겨울과 봄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날씨 때문에 점심에는 더웠다가 하교 시간에는 추위에 떨었다. 본 캠퍼스 근처에 있는 자취방에 가기 위해 2시간 동안 지하철을 탔고 내려서 버스를 타러 가려는데 비가 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뛰어서 버스를 탔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자취방에 도착하니 고모가 부쳐준 여러 주방용품 택배가 와있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나는 일단 방에 누워 잠시 쉬었다. 그 잠깐 동안 오늘도 낯선 캠퍼스, 낯선 사람들 속에서 혼자여야 하는 하루에 적응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다는 생각에 한없이 우울에 잠겼다. 겨우 일어나서 택배를 뜯기로 했다. 락앤락, 냄비, 국자 등 필요한 물품이 가득이었지만, 정리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그런 마음을 갖고 대충대충 휙휙 정리하다 보니 박스 안에 있던 설명서에 손가락을 제대로 베였다. 


  소름 끼치게 파고드는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고,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자 쓰라린 느낌이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다친 손가락을 확인해보니 피가 맺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빨간 피를 보자 놀란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은 원룸인 자취방에 내 심장이 끼인 것 같았다. 


  휴지를 뽑아 대충 접어서 상처를 감싸고, 밴드와 연고를 찾아 쭈그려 서랍을 여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순간, 너무 서러웠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짜증 났다. 혹시 몰라 자취방에 사 둔 연고가 분명히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밴드만 찾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상처 위에 붙였다. 택배 박스는 대충 치워두고 바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준비를 하려고 씻는데, 베인 상처에 물이 들어가서 또 아팠다. 나는 어린애가 된 것처럼 혼자인 방에서 또 잉잉 거리며 울었다. '내일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는 더 아프겠지, ' 하는 생각을 하며 도륵도륵 눈물로 배게를 적셨다. 별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하루 종일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있는 방에서조차 다치고 나니 그날 하루는 세상이 다 타인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개운하게 일어나서 머리를 감는데 예상대로 손가락이 진짜 아팠다. 그래도 전날처럼 울지는 않았다. 그냥 자연스레 괜찮아졌다. 밴드를 갈기 전에 한 번 더 열어 본 서랍에서 연고도 발견했다. 이상하게 안 풀리던 날은 지나간 것이다.


  1년 전 저 날을 기억해낸 날은 알바 중에 다친 날이었다. 그때도 확실히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고, 거울을 보면 얼굴에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서빙 실수도 했고, 함께 일하는 이모한테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다 뜨거운 돌판에 손가락을 제대로 데었다. 점점 하얗게 올라오는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울보니까 앞치마 집어던지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난 성인이니까... 꾹 참고 알바를 마친 후 집으로 퇴근했다. 그런데 '꼭 오늘 같은 날이 작년에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쓴 일기에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다치게 되는 날도 어쩌면 괜찮은 건가, 싶어서 기록을 한다. 왜냐면 작년의 그 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똑같이 손가락을 다치고도 금방 극복했다! 샤워할 때 잠깐 쓰라리다고 울지도 않고 자기 전에 스스로가 한심해서 베개를 적시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새벽까지 이 이야기를 블로그에 적고 있으니 말이야.^^'


그냥 이렇게 또 다친 날이 지나가는구나 싶다. 다친 날의 내일은 아무는 날이 될 테니까. 괜찮다고 나 스스로 위로하는 거다.

  저 문장으로 마무리한 그때의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었다. 2018년에 써둔 이 일기는 햇수로 3년이 된 지금의 나까지도 여전히 위로한다. 힘든 날, 다친 날이 찾아오면 이 일기를 꺼내어 읽는다. 그리고 되뇐다. 그래, 이런 날도 있었지. 내일은 아무는 날이 올 거야.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하루도 안 풀리는 날, 유난히 힘든 날, 다친 날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연히 열어본 서랍에서 찾은 연고같이 당신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글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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