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매년 오는 연말이지만 예년과 다르다 아쉬워할 때 연말은 온다. 새해 다짐이 무색하게 느껴질 땐 찬 공기가, 곁에 있어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따듯한. 그런 사람마다 다른 연말이.
일흔 살 넘어 형을 찾아 떠난 앨빈의 이야기를 보며, 내가 그의 딸도 가족도 아니건만 눈물을 훔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눈에 맺힌 눈물이 겨워서. 사람 많은 술자리에서 같이 흘리지 못한 것들이 이제야 물길을 찾는다.
버스를 탔다. 한강을 지날 땐 사람들 눈에 어른거리는 게 있다. 우리에겐 느껴지지 않는 신화지만. 잔잔한 물결 위로 비치는 햇살과 그 아래 가늠하기 어려운 눈먼 수심은 잠시 모든 걸 멈추게 한다.
금요일엔 급한 일을 끝내고 집 가는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오늘은 주저앉은 꼬마를 내 자리에 앉혔다. 꼬마 옆 엄마의 미안해하는 눈길을 보며, 잘해 놓고도 그간 무심했던 내 마음에 놀란다. 왁자지껄 떠드는 꼬마들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런 가사가 있다. '이제는 다 지난 얘기라고 큰소리로 웃어 보기도 하고, 나 답지도 않은 말을 하고'. 시니컬에 속아 낭비하지 않은 척 곤두선 감정과 상처받지 않은 척 방치한 마음. 그런 것들은 자꾸 꺼내 보아야 한다.
'어른스러운' 얘기를 하다가도 금세 싫증이 나는 건 묻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다. 푸념과 토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은 게 어른이라면 어른일까. 서로 못 알아듣는 얘기를 해야지만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러니에 욕지기도 치민다. 신나게 웃으며 미끄럼틀 타고 싶은 건 다 똑같을 텐데.
피차 궁색해지는 걸 알아도, 오랜만에 만나 서운하다는 얘기만 늘어놔도, 나 뭐 먹고 사니 투정만 부려도, 고맙다, 고맙다. 서로 손 잡으면 따듯한 걸 알기에.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 걸 알기에. 내가 다가가기 어려울 땐 와 주는 걸 알기에.
그런 연말이라 달콤 쌉싸름하다. 우울한 친구들과 미친 척 웃어서, 힘들어하는 직장 동료들과 애써 웃어서, 오묘한 표정의 L과 같이 울고 불어서, 어떻게 알고 버선발로 달려온 오랜만의 친구들이 많아서. 달콤하다. 쌉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