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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Apr 14. 2023

갑오징어 지나 부암동

 에 카페에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밤에 하는 산책과는 다른 감상이 거기엔 있다. 골똘한 사람들, 수다 떠는 사람들 보고 있노라면 전에 없던 생명력 같은 게 돈다. 급하게 도망쳤던 곳 근처를 다시 기웃거리며 드는 심정은 사실 별 거 아니란 생각. 차라리 감사해 버리고 만다. 나더러 누가 가면이 많다고 했었지. 인정하니 편하다.


 전날 밤을 또 휘발시키고 기어 나와 당도한 곳은 부암동의 카페. 언덕 위 전망 좋은 테라스, 도로도 아니고 산도 아닌 어느 지점을 응시하다가 문득 지나간 대화를 생각해 본다. 브런치를 자주 쓰지 않아도 주변에선 연락을 마칠 때마다 브런치 잘 보고 있어요, 한다. 어떤 글을 읽었을까, 어디가 좋았을까, 아직 진짜 멋진 글은 보여주지 못했는데, 하는 속 좁은 생각에도 잠시 머무른다.



 소싯적 감사 운동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세상 살며 가끔 몰아치는 비바람에 넘어지기 일쑤다. 겨울 뒤엔 결국 봄이 온다고 L이 얘기했었지. 하룻강아지에서 서당개가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게으른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몸을 재단하고 귀 근처엔 응당한 말들을 모았다. 운동밖에 모르던 친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웃어넘기던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인다.


 힐링갠지스 같은 제목에 너무 많은 자연 사진들, 그런 아저씨 에세이를 쓰게 될 줄은 몰랐건만 감사 운동 막바지 과제가 자기 나름의 담백한 일기일 줄이야. 이것도 가면이면 좋겠다. 그래 사실, 인정하니 편하다. 맛있는 블루베리 스무디 한 잔, 글 한 편을 쓰고 허기진 배로 근사한 식당을 검색하는 일만으로도 주말은 감사하다.



 가 내렸다. 비 오는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냄새, 팅팅 물방울 소리가 좋다. 가끔 받는 메일 서비스에 적힌 공연 소식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아는 척하기 바쁜 문화생활 속에 가끔 도피하듯 무명 연주 앞에 멈춰 선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아늑함에 딱딱한 바닥에도 편안한 자세가 나온다. 자작곡을 연주하기 전 K의 눈빛이 빛난다. 삼바 하면 다들 요란한 것만 생각하는데, 남미에서 만난 삼바의 전신은 사뭇 다르다며. 벅적이는 마음속에, 원래 그런 건 아닌 삼바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시민청을 나와 공원을 거닐다 엄마가 좋아하는 라일락이 핀 걸 본다. 그 옆으론 XX파업, 그 옆으론 XX대책위원회…. 내가 알고 있던 삼바를 다시 생각한다. 청계천을 따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오후 두 시 산책길. 세종대로로 향하며 구김살보단 백치로 살고 싶다 다짐한다. 아직 비가 내려 감사하다. 비 오는 오후의 공기와 냄새를 즐긴다.



 4월엔 오징어가 없어서 갑오징어를 판단다. 양재에서 퇴근한 친구와 갑오징어를 먹으며 막무가내 감사 운동 끝자락 미련을 후련하게 보내 준다. 봤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걸 용납하지 않던 내게 뜬금없이 놀라며 눈물 바람 주책으로 남은 감상까지 탈탈 턴다. 일기보다 메뉴판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는 없지만 제대로 방학이다. 겨울 지나 봄방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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