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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20. 2020

'그러나'를 알게 된다면

감정의 이중성에 대하여


드라마, 소설 또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이야기 속 다른 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감정이나 사건, 숨겨진 이야기를 모두 알기에 그들이 말하지 못한 '그러나' 또는 '속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게 되고 악인을 옹호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네이버 웹툰 중 <좀비딸>이란 웹툰이 있다. 좀비딸은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의 줄임말이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에 어느 날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 좀비를 피해 도망치는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정환의 딸 수아가 좀비에게 물리고 만다. 정환은 좀비가 된 수아를 데리고 시골의 어머니 댁으로 피신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지 1년 후 대한민국에서 좀비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유일한 좀비인 수아가 남았다.


<좀비딸>은 좀비를 소재로 한 일상 코믹물이지만, 좀비가 된 딸을 지키려는 정환의 부성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환은 어떻게든 수아가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사회화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학교에도 수아를 보내 평범한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길 꿈꾼다. 그러나 만화라는 장르이기에 허용되는 것이지 실제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환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몰지각한 인물이다. 좀비 바이러스는 각고의 노력 끝에 퇴치되었지만, 수아의 좀비성은 여전하기에 다시금 제2의 좀비 사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환이 사실은 수아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단 사실이 밝혀지고, 자신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수아의 아버지를 자처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슬픈 가족사가 드러난 이후 수아의 친아버지가 찾아오고 친아버지는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한이란 것이 드러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아의 아버지로 인해 수아가 좀비란 사실을 들킬 위기가 찾아오고 그들은 간신히 위기를 넘기지만, 이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수아가 좀비란 사실을 들키게 된다. 이에 군부대가 투입되고 수아는 사살될 위기에 처한다.


지금껏 이 웹툰을 봐왔던 독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정환을 옹호하고 제발 수아와 정환이 군인을 피해 무사히 도망치길 바라게 된다. 현실에서 그들은 마치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와 같이 타인의 안전보다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이해하는 파렴치한 인간이지만, 지금껏 정환네 가족을 봐오며 생긴 감정이입과 슬픈 가족사가 맞물려 그들을 옹호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몇 해전 방영된 <아버지가 이상해>라는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극 중 주인공은 변한수로 살아가지만, 사실 그의 진짜 이름은 이윤석이다. 그는 살인마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며 전과자가 된다. 전도 유망한 유도 선수였던 그는 선수 생명도 잃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후 절박한 마음으로 향한 미국에서 사고를 당해 자신의 친구와 신분이 뒤바뀌게 된다. 그는 35년간 친구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죽은 변한수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게 되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고, 그는 자신이 35년간 친구의 신분으로 살아왔음을 자수하게 된다.


언론에 사건이 보도되면서 한수는 남의 신분을 도용한 채 살아온 희대의 파렴치한이 되지만,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게 된 시청자는 반대로 그를 옹호하고 이해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나면 마냥 돌을 던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럴 때마다 감정의 기이함을 느낀다. 현실과 대입하면 말이 되지 않고 그들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지금껏 함께 겪어온 사건 속에 드러난 속사정은 반대로 그들에게 측은지심이 들게 만든다. 만일 현실에서도 그와 같이 누군가의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단지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 현실은 그것과 다른 것일까?


가끔 우리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만 판단하고 뉴스 보도를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건을 겪은 이의 고통과 슬픔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 주는 일이 넘쳐흐른다. 만일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와 같은 속사정을 이해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사람의 감정은 참 기이하다. 타인과 아무런 일면식도 없을 땐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일단 관계를 맺고 유대감을 형성하고 나면 타인은 단지 타인이란 인식을 넘어 내 인생에 깊숙한 연관을 맺게 된다. 그가 어려울 때에는 도움을 주고 싶고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이가 뉴스에 나온다면 그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남일뿐이다. 그렇기에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 짓고 결론 내리는 일이 많다.


소위 인민재판이라 불리는 현상은 아무런 감정을 지니지 않는다. 맹목적인 비난과 분노만 도사린다. 만일 그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을 전혀 미안함 감정을 갖지 않는다. 인민재판의 대상은 한바탕 휩쓸리는 놀이의 희생양처럼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인민재판의 대상이 바로 내 옆의 지인이라면 우리는 어떤 판단과 생각을 하게 될까? 또는 그가 나의 가족이라면?


웹툰의 결말을 바라보며 감정의 이중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째서 현실 세계에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들을 옹호하고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게 되는 것일까? 단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라는 점을 인지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만일 현실에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감정은 어떻게 작동할까? 웹툰을 바라보며 감정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이상함을 느꼈다. 진실 속에 숨겨진 그러나, 또는 그들만의 속사정.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왠지 기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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