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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Sep 11.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19. Sarria - Palas De Rey

순례길 DAY 29. Sarria - Portomarin

순례길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나는 며칠 동안 이유 없는 컨디션 난조 때문에 고생을 했다. 피로가 누적된 몸과 항생제 때문이었을까? 쌀쌀했던 오전에 비까지 맞다 보니 체온이 뚝 떨어졌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걷는 내내 빨리 숙소에 들어가 눕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갈라시아 지방은 울창한 숲길을 걷는 길이 대부분이다. 숲길 사이사이 오르막과 내리막도 메세타지역 보다 더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신체적 피로를 더 빨리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걸었던 길은 특히 갈리시아주에 넘어와서 매일 맡게 되는 시큼한 소똥냄새를 제외하면 나름대로 곶자왈 사이를 지나는 제주 올레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고즈넉한 코스였다. 

스페인이나 유럽에서 크거나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면 인근에 저런 공동묘지를 만나게 된다. 보통은 마을을 지나는 도로 입구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어떤 공동묘지에는 작은 성당이 가운데 위치해 무덤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리고 무덤 주위로 벽을 둘러서 외부인이나 짐승들이 함부로 무덤을 훼손하지 못하게 관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평소 제주에서 올레길을 걸을 때 자주 마주치게 되는 제주도만의 특징적인 무덤인 '산담'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지나치게 되는 마을 공동묘지도 시간이 나면 꼭 한 번은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뒀다. 작은 마을에 있는 공동묘지를 살펴보면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경제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은 또 어떠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정보들을 얻게 된다. 그것뿐만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문화적 차이도 재밌다. 특히 삶과 죽음을 공간적으로 엄연하게 분리해서 관리하는 스페인의 공동묘지와 제주도의 무덤을 비교해 보면 더 그렇다.  

순례길에서 만난 공동묘지

차가운 대리석으로 죽은 자를 위한 공동의 공간을 마련해 집을 지은듯한 스페인 식의 무덤과 제주의 무덤(산담)은 외형 뿐만아니라 무덤이 자리한 위치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산담'은 일반적인 한국의 무덤과 흡사한 엎어놓은 밥사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특이하게 돌로 담을 쌓아 무덤을 둘러놓았다. 대개는 직사각형으로 두꺼운 담을 쌓는것을 산담이라고 부르지만 간혹 타원형으로 담을 쌓기도 했고 담이 없는 무덤도 있다. 돌담의 형태가 다른 이유는 집안의 가세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 같은것인데, 어떤 돌담이 쌓을때 더 많은 돈이 필요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올레길에서 만난 여러 형태의 산담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산담을 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밭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특히 밭에 묘를 쓴 산담을 마주하면 평범한 제주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일터 지근거리에서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의 무덤을 돌보면서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산담을 바라보면 내세를 위한 어떤 특별한 희망이나 죽은 이를 섬김으로서 현재 삶에 대한 대단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 같은 무심함과, 생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산담은 죽은자를 기념하기 위해 죽음을 별도로 모아둔것이 아닌, 삶의 터전 일부를 떼어내어 죽은 자와 공유하는 공유지로써 존재한다. 내가 유독 산담을 아름답게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몇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는 그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산담을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얻곤 했다. 

마지막 축산농가를 지나니 멀리 큰 강이 보인다. 조금 후 이날 머물 마을인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큰 강 때문에 눈이 시원해졌다. 하지만 너무나 피곤한 탓에 바깥구경을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 씻고 바로 누워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항생제 때문에 술도 마실 수 없어서 나는 조용히 숙소에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여행길에 몸이 아픈 건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별 탈 없이 컨디션이 다시 좋아지길, 감기나 코로나에 걸려 일정을 허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순례길 DAY 30. Portomarin - Palas de Rey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침

참으로 감사(?)하게도 오늘부터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날까지 계속 비가 내릴 예정이란다. 나는 어제 잠을 충분히 잔 덕택에 걷는 건 다행히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밤부터 내린 비 때문에 기온이 영상 5도까지 떨어진 데다 계속 비바람이 몰아쳐서 우비를 입은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날씨 불평할 수는 없었다. 갈리시아 지방에 오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매일 맑은 날씨에 걸었으니 말이다. 

순례길 마지막 100km 지점부터는 산티아고까지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순례길 인증서를 주는 정책 때문에 갑자기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순례길이 어느덧 북적북적 해졌다.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고, 단체복을 입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성수기인 여름에는 하루 최소 800명 정도가 한 코스를 지난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나머지 100km 지점에서의 숙소 쟁탈전은 더 치열할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피곤한 일이다. 한 달여를 걸어 산티아고에 거의 다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이곳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과 누가 더 숙소를 먼저 잡는지 씨름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비수기와 성수기 사이인 지금 시즌에 순례길을 걷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요하고 쾌적한 분위기의 순례길을 원한다면 절대로 성수기 시즌은 피하는 것을 추천한다. 

순례길 막바지 즈음에 이르니 한국에서 가지고 오면 안 되는 몇 가지 것들이 생각나서 적어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에 비추어본 것들이다. 


1. 비싼 기능성 옷과 물건들

-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잃어버렸다.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내가 구입한 옷들도 잘 알려져 있는 좋은 성능의 기능성 제품 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빨래를 널 때에도 어디에 그냥 둘 때에도 누가 가져가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선글라스는 순례길을 걷다 보면 렌즈가 조금은 상하게 된다. 그러니 순례길에서 입을 것과 액세서리들은 되도록 저렴한 것들, 순례길 이후에 버릴 것들을 가져오는 걸 추천한다. 싸구려 선글라스나 옷들도 다 제 기능을 한다. 


2. 복잡한 마음의 짐

- 나의 경우 순례길은 이성적 사유보다는 육체적, 감정적 체험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앞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순례길에서 복잡한 마음의 짐은 매듭의 시작과 끝조차 찾을 수 없다. 피로와 근육통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마음의 짐들은 잠시 잊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언젠가 당신을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걷는 것에도 집중하기 힘들고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순례길을 오기 전, 복잡한 마음의 짐은 한국에 내려놓고 이곳에서 아무것도 얻어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면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 지병 혹은 건강문제

-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까? 순례길에서 갑자기 아프면 너무 서럽다. 그동안 정들었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고 알베르게를 전전하거나 뜻하지 않게 호텔이나 병원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지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신체적 안전과 관련된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순례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일주일에 단 하루도 5km 이상 걷거나 뛰지 않는 사람이 왜 순례길에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당신이라도 이 길을 도전하고 싶다면 되도록 반년에서 일 년 정도는 걷는 것에 익숙해지라고, 걷는것 자체를 좀 더 좋아하라고 말하고 싶다.  


4. 고민하다 더 챙긴 것들

- 결국 모두 짐이 된다. 가방을 싸다 보면 몇 개의 물품들이 필요할지, 필요 없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나는 대부분 그런 물품들을 챙기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후회를 많이 했고 결국 대부분은 알베르게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거나 두고왔다. 버리기 애매한 물건들은 어찌할 수 없어서 난감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등산스틱. 결국 하나는 알베르게에 두고 왔다. 여분의 반팔티도 버렸다. 속옷도 3개면 충분했다. 양말도 2개면 충분했다. 뭐 거의 다 이런 식이었다. 고민하면서 챙긴 것들의 대부분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순례길의 짐은 '이건 정말 필요해'하는 것들이면 충분했다.  


5. 내 몸무게

- 단기간에 살도 빼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고 싶다면 이만한 여행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 몸에 주어진 무릎은 단 두 개뿐이다. 순례길을 오기 전 가능한 최대로 당신의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 좋다. 한 달 동안 평균 25km를 걸어야 하는 이 여정에서 무릎부상으로 중도포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물집이나 가벼운 근육통은 대부분 응급처치로 해결되지만 무릎은 그렇지 않았다. 내 주변 동료들 경우 무릎에 문제가 생긴 대부분은 과체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였다.  

순례길을 즐겁고 산뜻하게 걷는 최고의 준비는 가벼운 몸과 마음. 이 두 가지면 충분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런저런 가젯들을 넣을 수 있는 다운자켓 하나만 입고 순례길을 걷는 미니멀리즘 유튜버의 영상을 봤다. 내 눈에는 그것 또한 일종의 극성맞음으로 보였다. 그의 미니멀리즘에 경도될 사람들의 조회수를 마음의 짐으로 지고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까웠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짐을 내 어깨에 둘러매고 걷는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편 그것이야말로 이 길의 매력이고, 나를 새롭게 발견 하게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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