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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ul 16. 2024

20년 된 에어컨은 하루 중 딱 한 시간 켜진다.

수호신인가 꿀빨러인가..

우리 집의 어른은 엄마, 아빠지만 내가 부모님보다 더 극진히 예우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에어컨과 선풍기. 이 둘은 각각 20년 넘게 연식이 된 고물.. 아니 조상님이시다. 물론 집 대부분의 가전이나 물품은 세월이 꽤 된 것들이지만 이 둘에 비길 놈들은 아니다. 여름이 오면 수박, 복숭아를 기다리는 설렘보다 '올해는 버틸 수 있을까'하는 걱정 어린 고민을 들게 하는 분들이 바로 이 분들이란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해도 에어컨과 선풍기는 자리를 보존했다. 에어컨은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아이보리로 염색이 되어 그렇지, 본인에게 떨어진 냉방 명령은 정확히 수행하는 게 감탄스러울 정도다. 선풍기 역시 각도를 조절하면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진 건지 사실이 그런 건지 요즘 나오는 선풍기 바람은 이만큼 시원하지가 않아 도무지 쓰레기로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엄마는 '실외기 소음이 시끄러워 바꾸려 했는데 요즘 나오는 에어컨도 실외기 소음이 크다'며 올해도 에어컨 구매를 미룰 핑계를 찾았고 난 그냥 믿는 척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이 둘은 여름 한철 쓰고 마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 집 여름을 수호하는 신령 같기도.


왜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까..로 쓰고 싶지만 다소 무엄해 보인다)를 생각해 보면 '별로 안 써서' 인듯하다. 우리 집은 에어컨을 정-말 잘 틀지 않는다. 온 동네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터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우리 집 에어컨은 밤에 딱 한번, 자기 직전 1시간 정도 냉방을 마친 후 우리와 함께 고요히 잠에 든다. 경로 우대냐고? 그건 아니다. 온종일 틀 수야 있지만 전기비도 부담이고 '이 정도는 정신력으로 이겨내'라는 집주인의 말씀에 따른다. 한 시간 넘게 쐬면 춥기도 하고. 얹혀사는 사람은 그냥 참아야 한다. 아니면 독립을 하든가! 그래도 성질이 부륵부륵 날 때가 있다. 오늘처럼 운동하는 시간을 잘못 맞춰 에어컨 트는 시간에 맞게 도착하지 않으면 땀에 젖은 버티거나 씻은 무색하게 땀을 흘려야 한다. 속에서 하악질 하는 고양이 오만마리가 괴성을 지르다 에어컨이 켜지면 무념무상으로 바뀌는 나, 더위, 우리 집 누가 제일 독할까. 하.


에어컨은 나름 '꿀 빠는' 집에 와서 이제까지 버텼는지도. 바깥 더위 무서운 줄 모르고 24시간 중 한 시간, 1년 중엔 겨우 한 달을 일하는 저 친구를 수호신으로 떠받드는 게 갑자기 억울해질 지경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느라 비슷한 연식인 선풍기도 열일하는데! 에어컨이면 다냐! 그래도 어째. 저 둘이 없는 여름은 상상하기도 싫은데. 언젠가 저 둘이 운명을 다해 내 손으로 놓아줄 때가 되더라도, 삐까뻔쩍한 새 제품이 어엿히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지금의 여름이 왠지 그리워질 듯한 예감이 든다. 갈고닦은 덕에 눈에 띄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에어컨을 닦으며 속삭인다. 올해도 잘 부탁해요, 조상님. 제발. 


힘내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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