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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Dec 03. 2024

폐허가 된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면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의 개인적인 후기.

*해당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의 리뷰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가 싫은 분들은 드라마를 본 후 읽어주세요.


어떤 콘텐츠든 '기다려서 보는 일'이 적어진 요즘, 공개 날짜를 손꼽아 세게 만든 드라마가 있다. 바로 넷플릭스의 트렁크. 드라마처럼 호흡이 긴 콘텐츠는 배우, 소재, 감독, 극본 등 모든 요소가 어느 정도 마음에 차야 보겠단 결정을 내리는데, 트렁크는 내가 좋아하는 서현진 배우가 나오고 짧은 티저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의뭉스러운 스토리도 마음에 들었다. 영상미도 조악하지 않은 게 꽤나 신경 쓴 태가 나니, 안 볼 수 없지. 그렇게 공개 3일 만에 8화를 모두 보았다. 숏폼에 절여진 손가락은 30분짜리 드라마를 볼 때도 핸드폰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회에 50분 정도 되는 트렁크를 볼 때는 잠잠했으니 흡입력은 꽤나 있었다고 판단하겠습니다.



8화 내내 종잡을 수 없고 수많은 인물 간 끈적하게 얽혀있는 스토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티저만큼이나 모호하지만 줄거리를 어설프게 포용할 정도로 정리해 보면 '상처와 아픔을 가진 이들이 만나 각자의 세계를 부시고 재건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하지만 상처의 아묾과 연대를 담고 있는 작품치곤 너무 버석하고 건조해서 보는 내내 눈이 따가울 정도다. 가정 폭력, 부부간 강간, 감시 등을 매일 겪으며 자라온 인물과 아끼는 사람들의 물리적 혹은 사회적 죽음, 스토킹, 폭력 등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던 인물이 계약 형태로 조우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싶겠지만, 가끔 보이는 둘의 웃음이 얼굴 근육에 어색하게 느껴지겠다 싶을 정도로 희망과 삶에 대한 열망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욕망이 드러나는 지점은 많지만 발화되는 시점이 대체로 정복욕, 소유욕, 집착에 잡아먹힌지라 건전하다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좀 행복해지나 하면 발화점을 놓쳐 스러지는 관계라니, 8화가 아니었으면 좀 지쳤을 것 같아요 엉엉.


그럼에도 말미에 고개를 주억거렸던 이유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파괴된 개인과 파괴된 개인이 만나 서로를 구원한다는 서사는 좋아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물론 어떤 경우엔 마음속 무너진 블록을 하나씩 쌓아주며 도닥여주는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한 누군가에게 구원된 형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지론인 사람으로서 지속성이나 단단함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트렁크에 나오는 인물들이 눈감고 막연한 희망을 기다리며 손을 잡은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부서진 세계를 바로 잡은 후 그 시간을 공유하며 재회하는 결말은 성숙하고 오히려 'happily ever after'에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은 아프고 외롭겠지만 견뎌낸 만큼 단단해진 얼굴로 만날 수 있단 건 그 자체만으로 성장했다는 증거이니까. 그런 사람들이라면 사랑을 해도 이전만큼 아프지 않겠지, 안쓰러움이나 부/모성애에 가까운 형태보단 성숙한 인간 대 인간으로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는 사랑이 더 건강할 테니까.


결론은 아름답게 맺어졌지만 전개 과정 속에서 상처를 대하는 인물들의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서현진이 맡은 노인지는 반복된 비극 속에 습관처럼 염세적 태도를 취한다. 이게 정점에 이르는 대목이 스토커인 엄태성을 놓친 후 한정원에게 "나는 이제 지쳤다"라고 말하는 대목인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 드라마를 봤구나 할 정도로 서현진 연기가 엄청나다.. 세상만사가 지독히 피로하고 무거워 곧 아스팔트를 늪지대 삼아 침잠할 듯한 몸짓과 눈빛 모두 장면을 압도한다. 공유가 맡은 한정원은 수동성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성인이 된 이후 비극을 맞은 노인지와 달리 성장 과정 내내 비물리적 형태의 폭력을 당했기 때문일까 유아기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 인물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적극 활용하는 인물이 바로 한정원의 전처 이서연으로, 약물과 가스라이팅으로 한정원을 온전히 통제하려는 그녀의 찝찝한 욕망은 "미친 거 아니야?"를 오백번 중얼거리게 만들었다. 트렁크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도 '통제'인데 감시, 조종, 학대, 호소, 죄책감 유발, 폭력, 관계 통제 등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결국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일인지를 느끼게 한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삶을 헤집으려 드는 자들은 트렁크와 함께 세상 아래로 꺼질 뿐.


어떤 형태의 예술이건 좋은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던데. 트렁크는 꽤 많은 질문들을 남겼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어떤 형태로든 통제는 부정적이고 불건전한 것일까. 삶의 주도권을 가지는 건 왜 중요할까. 이미 침해된 삶이라도 재건하면 그만일까. 우리는 그런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계약 결혼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나. 결혼의 본질은 무엇일까 등등. 글을 쓰고 보니 계약 결혼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스토리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 느낌도 든다. 좋은 작품의 또 다른 요건은 적절한 소재로 더 큰 이야기를 그려낸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트렁크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일 수도. 오랜만에 드라마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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