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다시 일하게 된 것은 6년 만이었다. 6년 전 그가 우리 부서에 발령을 받아 첫 출근을 했던 날, 우리 부서 사람들은 짓궂게 회식을 잡았었다. 그리고 관찰했더랬다. 첫 출근날 족히 황당했을 회식 권유에 그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좋죠, 저를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쩌면 텃새였을 신고식에 긍정적 의미부여로 응답해준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2주도 채 되지 않아 대부분의 직원과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위아래에 스스럼없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으로 핵인싸임을 입증했다. 팀으로 움직이고 고객을 주로 상대하는 서비스업종인지라 그의 사교성은 빛을 발했다. 때로 조금은 무리였으리도 모를 일을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 어떤 사람이나 어떤 부서에서나 그와 일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짧은 경력에도 주요 부서로 스카우트된 이유이다.
6년 만에 같은 부서에서 A와 다시 일하게 되었다. 여전히 유쾌하고, 여전히 친절하고, 여전히 긍정적이다. 더욱 세련된 스킬로 고객들을 응대하고, 이제 1주일도 안된 동료들과 마치 1년은 일했던 것인 양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좋다고, 옳다고, 동의한다고 하는 그 사람의 말 뒤에 자꾸 묻게 된다.
'진짜로 동의하는 건가?', '진짜 나를 신뢰하는 건가?'
꼬였을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착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착하고 좋은 사람'. 내게 아직 착하고 친절할 시간의 역사가 없음에도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절한 사람은 부담스럽다. 그들의 친절함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꼬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A의 무한 동의와 찬사가 나 개인이 아닌 직장 상사인 나에게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반문한다.
'직장에서 정직한 답변이 필요한 건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A는 다양한 리더를 경험했다. 중간 리더의 직급을 가진 그가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와 일했을 때였다고 했다. 평가자인 리더가 자신을 인정해주니 안 따를 수도 없고, 부서원들의 고충을 아니 이들의 고충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리더의 명령에 순응하고, 부서원들의 고충에는 경청과 위로를 건넸다. 리더에게도, 부서원에게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그의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으로, 그리고 결국, 그는, 리더에게도, 부서원에게도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본다. 그의 친절함에, 그의 Yes에 나는 기여한 것이 없었던가? 신입이었던 그 시절, 텃새에 굴복(?)하는 그에게 '사회생활 잘한다'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도한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던 그에게 '역시 A 같은 사람이 있어야 조직이 굴러가'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부서원들의 지적이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그에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떠했을까?
우리 세대 직장인들이 MZ세대와 일하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직급과 직위가 갖는 힘에 예스를 할 수 없는, 아니하지 않는 세대가 등장했다. 어쩌면 내 의견을 정직하게 평가해줄, 그리고 거침없이 수정해줄 세대가 등장했다. 도전이지만, 그래서, 풍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