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어느 날. 나는 서울 아산병원에 있었다. 고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장례식 때문이었다. 신 회장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수십 명의 기자들이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그중 한명이었다.
나흘간 차려진 빈소에는 많은 재계 오너들이 다녀갔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구광모 LG그룹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정용진 이마트 부회장 등 재벌들이 총출동했다. 정치인 이낙연이나 황교안, 전 야구선수 박찬호 같은 유명인들도 이곳에 왔다.
그룹 총수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맞절을 하려면 소위 '급'이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고인과 생전에 특별한 인연이 있던지.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 롯데호텔 홍보를 맡으면서 신격호 회장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장례식 사흘째 되던 날. 빈소에 온 인사 중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쿠팡 김범석 의장이었다. 그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곳에 홍보 임원들을 서너 명 대동하고 나타났다. 여느 대기업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 했다.
홍보팀 직원은 두 기업의 영업 관계 때문에 김 의장이 조문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놨을 거란 추측도 했다. 롯데는 사업의 뿌리가 일본에 있고, 쿠팡 최대주주는 일본 소프트뱅크가 만든 비전 펀드라는 것이다.
나는 한편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갓 벤처 티를 벗은 창업주가 저렇게 자신감 있게 나온다고? 재벌가 오너들이 한창 조문을 하고 있는 이 시간에, 언론사 기자들이 수십 명 진을 치고 있는 이 자리에. 소위 급이 다른 기업의 대표가, 임원 서너명 보좌까지 받으며 조문을 한다는 건 하여간 보통은 아닌 것같다고 느꼈다.
실제 신 회장 빈소를 찾은 기업가들 중 벤처 창업주는 한 명도 없었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포털 공룡은 물론, 위메프 티몬 이베이 등 다른 이커머스 대표들도 그곳에 오지 않았다. 자랄 때부터 '로열'이었던 재벌가 사람들과 2000년대 창업한 자수성가형 기업가들은결이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팡 김범석 의장은 그 장례식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마치 본인이 이곳에 왔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더 유심히 지켜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