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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미의 정원 Sep 05. 2020

그레그, 그의 심장엔 새가 사네

프레리의 자연_블루버드 트레일(1)

 

 프레리의 자연

 캐나다에 산 지 이제 햇수로 5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세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사스카툰 Saskatoon에서 보냈어요. 사스카툰은 캐나다 중부의 대평야 프레리 지역에 위치한 서스캐처원 Saskatchewan 주에 있는 인구 약 27만의 도시입니다.


 프레리란 그야말로 넓고 평평한 땅입니다. 이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도록 하죠. 당신은 지금 차를 타고 도시의 외곽으로 나가고 있어요. 한 15분쯤 지나자 당신이 마주치게 되는 풍경은 사방이 360도 완벽히 뻥 뚫린 지평선이에요. 그런데 그 지평선의 양 쪽으로 해와 달이 동시에 당신에게 ‘안녕!’ 하며 인사합니다. 순간, 당신은 지금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상상력을 좀 더 가져가 볼까요? 당신은 벌써 세 시간째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빛 밀밭 길을 차로 지나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 하늘 ‘저 편’ 위의 회색 구름이 아래 세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한 폭의 비구름 폭포를 봅니다. 처음 보는 이 압도적인 풍광에 당신은 신비로운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뭘까 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갖게 됩니다. 당신의 의식과 무의식은 주변의 단서들을 토대로 유추하고 추론하며 답을 찾아 나갑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저 편’이 몇 킬로미터가 아닌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것과, 저 편에서 비를 내리고 있는 상공의 비구름이 바로 지금 당신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는 비구름 폭포의 정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이것을 알게 되는 시간과 경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곰팡이 없는 보송보송한 여름은 어떤가요? 녹음을 즐길 때가 되었나 싶은데 어느새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면요? 5분 안에 맨손 동상을 부르는 겨울도 있어요. 한 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겨울이라면 우리의 인내심이 시험대에 놓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쯤이면 프레리의 공간이 짐작되시나요? 캐나다 프레리의 시간과 공간은 타지인에겐 너무나 색다르고 너무나 광대하며 또한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한눈에 보이지도 한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 초현실적인 감각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고 한번 익숙해지면 그곳은 당신의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될 거라 장담합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의 밀밭_레미의 정원 2016

 

 매가 맺어준 인연

 사스카툰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무척 막막했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인 데다가 말과 음식, 사람과 기후, 게다가 자연환경까지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나는 우선 자연을 통해 하나씩 접점을 찾아가기로 하고 주변 탐색을 시작했어요.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에서 주관하는 ‘붉은 꼬리 매와의 만남 이벤트 Meeting with Red-tailed Hawk Event’였습니다. 매라고 하면 예전에 한국의 전통 매사냥 시연회에서 본 적이 있었죠. 우리 선조들이 매의 거친 야성을 길들여 사냥에 활용하고 함께 공생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사스카툰의 매도 한번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한국 전통 매사냥보존회 시연회_레미의 정원 2015


아이의 매 그림_레미의 정원 2015


 2016년 4월의 어느 주말, 와일드 버즈 언리미티드 Wild Birds Unlimited라고 하는 네이처 샵에서 열린 붉은 꼬리매 이벤트에는 아이가 있는 가족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40여 명가량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그레그 휀티 Greg Fenty를 처음 만났어요.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Saskatoon Young Naturalists라는 단체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와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붉은 꼬리 매가 마치 그와 한 몸인 것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둘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레그는 매의 생태적 특성에 관한 과학적이면서도 인문학적인 다양한 이야기를 자상하고 친근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고 많은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게 오고 갔습니다. 그곳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스카툰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들을 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가 궁금해서 온 이벤트였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 그레그가 진행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 블루버드 트레일 Bluebird Trail도 이곳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붉은 꼬리 매에 대해 설명 중인 그레그 휀티_레미의 정원 2016



블루버드 트레일 Bluebird Trail

 블루버드 트레일은 그레그가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에서 진행하는 자연교육 체험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블루버드 트레일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트레일을 따라 놓인 새 둥지를 둘러보고 블루버드 및 여러 토종 새들의 개체수를 모니터링하고 새의 다리에 트랙킹 밴드를 달아주는 일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어요. 생태에 관심 있는 이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있지요. 나는 2016~2018년, 삼 년에 걸쳐 그의 블루버드 트레일에 아이와 함께 참여했어요. 매번 참여할 때마다 새로운 경험과 배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그레그를 새롭게 보게 된 어느 특별했던 오후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프레리의 날씨는 매우 다이내믹해서 다음 순간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름 땡볕에 갑자기 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져서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기도 하고, 일정하지 않은 일교차로 인해 어떤 날은 한낮에 30도로 치솟았다가 저녁에 초겨울 날씨로 곤두박질치기도 합니다.


 블루버드 트레일을 나갔던 그날도 그랬어요. 6월 말의 여름이었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고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았습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들판에서 새들은 제자리걸음을 하듯 힘겹게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라 아이 데리고 오느라 지친 데다가 옷마저 얇게 입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한기를 느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여분의 옷이 차에 있는 게 생각났어요. 입지 않는 옷들을 기부하려고 차에 넣어둔 것이었지요. ‘오, 수호천사님, 고맙습니다!' 나는 얼른 차로 달려가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단지 옷 한 겹 덧입었을 뿐인데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깊은 안도의 숨이 쉬어지면서 비로소 살 것 같았습니다. 나의 시선은 문득 그레그를 향했습니다. 그는 얇은 소재의 오렌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습니다. 안쓰런 마음이 들어 내가 이렇게 물었어요.


“바람이 차갑고 많이 부는데 셔츠 하나로 춥지 않나요? 재킷이라도 걸치는 게 어때요? 내게 여분의 옷이 있어요.”


 그러자 그가 특유의 밝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내가 두껍게 입으면 새들이 느끼는 걸 느낄 수 없게 돼요.”


 나는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어요. 머리와 입이 얼어붙어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생각의 세계는 서로 너무나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의 세계는 물 한 방울 몸에 튀었다고 세상 떠나갈 듯이 소리 지르는 세계였고, 그의 세계는 깊은 바닷속 고요한 고래의 세계였어요. 고래 앞에서 내 입은 조용해졌어요. 그와 함께 하는 블루버드 트레일은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인 동시에 그의 심장 안에 사는 따뜻한 고래와 지혜로운 새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려 깊은 그의 말 한마디가 그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두껍게 입으면 새들이 느끼는 걸 느낄 수 없게 돼요


블루버드_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야생식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오렌지 셔츠의 그레그_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2019


 “아이들과 일하는 것이 나는 좋아요. 아이들은 정말 열려 있거든요. 겨울잠 자는 뱀을 관찰하러 나선 길에 다른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정말 재밌는 일이에요. 때로는 곁가지가 더 흥미롭기도 하거든요. 여러분도 자연으로 나가서 그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한번 보세요."

그레그 휀티_EcoFriendly Sask, Oct. 2019



 “봄이에요. 지구가 다시 한번 되살아나고 있어요. 올 해의 첫 가터뱀을 보거나 크로커스 꽃을 보게 되면 정말 신이 납니다. 펠리컨도 마찬가지지요. '와, 우리는 겨울을 이겨냈고 이제 곧 여름이 돌아올 거야'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레그 휀티_cbc interview, Mar. 2019


https://www.cbc.ca/news/canada/saskatoon/saskatoon-pelican-watch-1.5075402                                                                  



내가 사스카툰을 떠난 2019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레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자연으로 안내하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습니다.


입에 한가득 벌레를 물고 와서 먼발치에서 이방인들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 새_레미의 정원 2018


세찬 날갯짓도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해 제자리를 날고 있는 새_레미의 정원 2018


프레리의 야생 장미_레미의 정원 2018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Saskatoon Young Naturalists는 블루버드 트레일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블루버드 트레일은 50여 년 전에 보존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빈 나무에 둥지를 트는 블루버드 등의 토종 새들이 서식지 손실과 외래종 조류의 도입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개인과 조직들이 "블루버드 트레일"을 만들었습니다. 블루버드 트레일은 시골길을 따라 몇 킬로미터에 걸쳐 박스 모양의 새 둥지를 달아놓은 라인을 말합니다.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Saskatoon Young Naturalists는 랭햄 Langham에서 핸리 Hanley에 걸쳐 약 260 여개의 새둥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둥지를 모니터링하여 새의 종을 확인하고 알이나 새끼의 개체 수를 세어 번식력을 기록합니다. 또한 새들에게 다리 밴드를 달아주어 “우리 새”의 생존 여부를 모니터링합니다. 우리는 캐나다 환경부로부터 고유 번호가 붙은 다리 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들이 겨울에 어디로 이주했는지 또는 몇 살인지 등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수집하는 데이터는 살충제, 기후 변화, 그리고 물론 종 복구와 같은 모든 것을 연구하는 다양한 과학자들이 사용합니다. 또한 이 블루버드 트레일은 아이들이 생물 다양성 모니터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실습 자연 과학 프로그램입니다.”



 그레그의 블루버드 트레일과 영 내추럴리스트 이야기는 다음에 또 이어집니다.






* 사스카툰 영 내추럴리스트 Saskatoon Young Naturalists

사스카툰 자연협회 Saskatoon Nature Society와 사스카툰 동물협회 Saskatoon Zoo Society와 연계되어 자연 관련 활동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단체이다. 1968년에 만들어졌으며 5~11세 사이의 아이가 있는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레그 휀티는 1995년부터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https://saskatoonzoosociety.ca/programs/young-natur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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