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화합의 맛
사실 난 음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식탐은 강한 편이지만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줄 서서 먹는 모습은 나에게는 생경한 광경이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들린 음식점에서 입맛에 맞는 한 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뿐 음식은 나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결혼 전 혼자 자취를 할 때도 음식을 잘 챙겨 먹거나 예쁘게 꾸며서 차려 먹은 적이 거의 없다. 때마다 엄마가 보내주시는 국들을 얼려 그때 그때 밥을 말아먹으면 끝. 설거지 거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국그릇에 밥을 바로 말아먹는 식이다. 그 버릇은 여전해서 결혼한 지금도 간편식을 추구한다.
우리 집에서는 잘 차려진 밥상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습관들이 아이들과 신랑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집에서 대접받는 식사 한 끼를 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밖에서 같은 대접을 받지는 않을까 신경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대접을 받으며 자라온 것도 아니다. 엄마는 항상 국과 찌개를 함께 내놓으실 정도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주시고는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도 음식을 맛있게 잘 먹지는 않았다. 고기도 싫어하고 생선도 싫어하는 아이가 나였다. 그나마 즐겨 먹던 건 콩나물, 가지, 도라지 정도. 그렇다고 나물류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즐겨 먹던 건 된장찌개를 넣은 비빔밥이었다. 유독 된장찌개를 좋아하시던 아빠 덕분에 우리 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땐 집 안에 가득한 된장 냄새가 그리도 좋았다. 된장찌개를 한 번 끓이고 나면 온 집안에 베어버린 된장 냄새를 빼느라 몇 시간 동안 창문을 열어두어야 하는데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그 시간마저 까르르 웃었더랬다. 두부와 돼지고기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식탁 위에 올리는 순간 아빠는 큰 양푼 안으로 밥공기를 그대로 뒤집어 탈탈 털어 넣었다. 그 위로 콩나물이며 시금치, 도라지 등 각 종 나물들이 얹어지고 된장찌개를 서너 번 정도 두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숟갈을 휘익 돌려 비비면 맛있는 비빔밥이 완성된다. 아빠의 숟가락이 멈추는 순간 큰 볼 안으로 숟가락을 서로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다. 아빠는 본인이 드시는 것보다 우리가 서로 먹으려고 달려드는 그 순간을 위해 열심히 비볐다. 아빠의 뿌듯해하던 모습이 선명히 기억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러신 게 분명하다. 아빠의 비빔밥은 질지도 않고 뻑뻑하지도 않은 딱 적당선을 지킨 찰짐이 있다. 우직한 손으로 얇은 숟가락을 들고 비비는 모습에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된장찌개도 나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아빠의 비빔밥은 맛이 참 좋았다. 맛도 좋았지만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아니었나 싶다. 아빠의 전문가스러운 손놀림을 바라보며 비빔밥이 빨리 완성되기만을 기다리는 두 딸과 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비빔밥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모습. 그 날만은 아빠가 최고의 요리사이고 우리는 화목한 가족이 된다.
결혼을 한 후 친정에 가게 되면 아쉽지만 그때의 비빔밥은 더 이상 맛보기가 힘들다. 우리 네 식구만 모이는 것이 아닌 사위와 아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큰 볼 하나에 숟가락을 섞는 가족 음식은 더 이상 이룰 수가 없다. 어릴 때는 애써 만든 음식을 왜 한 곳에 넣어 다 뭉개버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먹기는 간편하고 쉬워 보여도 만드는 과정은 오히려 복잡하고 단계가 많다. 하나하나의 고유한 음식을 제대로 맛을 내어 준비하고 색감의 조합을 고려하여 노랗고 빨갛고 초록 초록한 반찬을 준비한다. 그 위를 된장이라는 특유의 한국음식으로 뒤덮어 사각 모양의 몽글몽글한 두부가 뒤섞이면 맛 좋은 비빔밥이 완성된다. 그 위에 계란 프라이까지 얹히면 그 날의 비빔밥은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된다. 비빔밥은 예쁜 그릇에 담아 먹기보다는 양푼 그릇 그대로 먹는 것이 맛이 더 좋게 느껴진다.
비빔밥은 우리 가족의 추억이 깃든 음식이다. 가끔 그때의 맛이 떠올라 친정에서 가져온 온갖 나물을 섞어 된장찌개를 넣은 비빔밥을 만들어보지만 그때의 맛은 흉내조차 낼 수가 없다.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 그대로를 넣었는데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빠의 우직한 숟가락 맛이 더해지지 않아서일까. 아빠의 비빔밥을 비비며 뿌듯해하던 그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옛날 사람인 아빠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요즘 아빠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아빠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빔밥을 비비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 가족의 전부였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빠의 숟가락이 멈춰지기만을 기다렸으니까.
비빔밥은 온갖 음식이 한 데 모여 어우러짐에도 환상의 맛을 자랑한다. 색이 섞을수록 검은색이 되는 것과 달리 다양한 맛의 음식이 섞이는데도 더욱 맛있어진다. 많은 음식이 섞이는 만큼 양 또한 풍성해져서 각자 소화할만한 할당량이 필요하다. 물론 할당량을 채우고서도 더 기웃거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림책 『여우 비빔밥』에서는 하룻밤 사이 부엌에 꽁꽁 숨겨둔 음식이 모두 사라져 마을이 발칵 뒤집힌다. 불평불만이 많은 ‘으르렁 마을’의 동물 친구들은 음식을 훔쳐간 여우를 잡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은다. 화가 잔뜩 난 동물친구들에게 여우는 먹음직스러운 비빔밥을 대접하고 친구들은 함께 맛보며 나눔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비빔밥은 화합과 나눔의 음식이기도 하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식들이 한 데 모여 최고의 맛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때 맛은 배가 된다. 음식을 도둑맞은 동물 친구들이 으르렁 거렸던 것처럼 우리 가족 또한 매사 화목하기만 한 가족은 되지 못했다. 각자의 시간으로 함께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때로는 부딪히며 다투기도 많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빔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둘도 없는 가족이 된다.
이제 두 딸들은 장성하여 각자의 가족을 꾸리고 살고 있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과 함께 우리만의 가족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