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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며늘희 Oct 13. 2020

집들이피해

격식없는 시모ㅣ뒷담화 하는 글

15. 집들이피해



자고 갈 준비를 하고 오신 분은 시아버지 한분이셨다.

시어머니는 잘 때 입을 옷을 가지고 오시지도 않았고 양치나 세면도구는 당연히 챙기지 않으셨다. 보통 여행을 가면 꼼꼼한 여자가 물건을 챙기는데 반해 어머님은 그런 편이 아니셨다. 그렇다고 아버님이 어머님 것까지 챙겨 오시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분은 언제고 마이웨이를 달리신다. 자신은 잘 때 입을 옷하고 씻을 거 다 가져왔다는 시아버지의 말과 달리 시모는 뭘 그런 걸 가져오냐- 그냥 이거 입고 잘 거야- 라고 하신다. 여기서 자기 위해 큰 옷을 입고 오셨다고 하신다. 


나에게는 사실 나름의 철칙이 있다. 밖에서 입은 옷을 침구로 들여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침에 샤워하는 것보다 저녁에 씻는 것을 좋아한다. 씻고 깨끗한 상태로 침대에 들어가고 싶다. 침대까지 밖의 공기와 먼지를 묻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잠옷만큼은 꼭 남편에게 강요한다. 이건 내 규칙이며 철칙이다. 시부모님에게 까지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님이 입고 오신 그 얼룩말 무늬 블라우스는 절대적으로 잠잘 때 입기에는 부적합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단추와 지퍼가 달린 바지는 오늘 처음 입으신 것인지, 며칠을 입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밖을 헤집고 돌아다녔을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침구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내 기준에 맞춰 밖의 공기와 먼지가 묻어있고 말고를 떠나서 그 옷은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옷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맨투맨과 고무줄 바지를 내어드렸다. 하지만 시모는 내 옷 중에서도 큰 옷이었음에도 니옷은 작다며- 단번에 거절하고 그냥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우셨다. 양치하실 것도 안 가져오신 거 아니냐며 칫솔을 새로 하나 꺼내드리자 그제야 씻으러 가셨다. 




원래는 안방을 내어드릴까 했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시면 엄마는 거실에 아빠와 함께 주무시고 안방을 내어드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온 나는 시부모님께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 우리의 침대를 내어드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단숨에 접었다. 내 침대를 사수하고 싶어 졌다. 다행히 남편도 우리가 밖에서 자자는 멘트도 없었고, 이런 나의 고민을 위해 서핑도 해보았지만 신혼집에서 자고 가시는 시부모님에 대한 고민의 글도 별로 없었다. 그래, 다들 신혼집에 찾아와서 하루 자고 가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군다나 며느리 생일에 오셔서 주무시는 시부모님은 없는 것이다. 겨우 찾은 고민 글에서는 무슨 안방을 내어드리나는 댓글이 압도적이었으므로 나는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시모가 얼룩말 무늬 옷을 입고 내 침대에 들어왔다면 나는 아마 신중하고 최선을 다해 고른 내 침구가 싫어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빨고 햇볕에 말렸어도 갖다 버리고 싶었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남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방으로 들어온 남편은 나를 뒤에서 꼭 껴안으며 너무 미안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고마웠지만 나는 단호하게 남편을 돌아보며 "이제 다시는 우리집에 모시는 일은 없어. 이런 식이면 함께 하는 밤은 절대 존재하지 않을 거야." 라고 대답했다. 물론 밖에 들릴까 봐 독서실 모드로 목소리를 내야 했지만 말이다. 남편은 무례하고 격식 없이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생일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쁘기만 하지 않던 나에게 너무나 미안해했다. 물론 시부모님에게 그날이 내 생일이라는 인식은 장미꽃을 주던 그 단 몇 분의 순간뿐이었다.






다음날 평소대로 주말 아침은 라면을 먹으면 된다고 시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배고픈 자 알아서 밥 찾아 먹는 주방에 사시는 시아버지는 원래 주말 아침은 자신이 끊여먹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런 주방을 고집하시면서 시모는 나에게 자신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그렇게나 전화하시니 이러한 아이러니한 적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시부가 라면을 먹자고 하였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나는 집에 있는 재료로 어묵탕을 해드리겠노라 하였다. 시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주말 아침에 라면이 아닌 다른 메뉴는 너무 오랜만이라고 하셨다. 그런말을 크게 하시는 시부의 말에도 전혀 당황해 하시지 않으시면서 시모는 반복해서 너희는 뭐 먹고 사냐고 뭐 할 줄 아는거 있냐고 연신 물어대셨다. 어머님이나 아버님 밥 좀 잘 챙겨주시고 우리의 부엌을 넘보셨으면 싶었다. 시어머니가 자신은 절대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셨던 것이 있어(미원은 쓰시지만) 나는 어묵탕을 끊이는 것이 조금 겁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인은 다시다 아닌가. 그마저도 포기하고 멸치에 국물을 내고 마늘과 대파 양파 등으로 시원하게 국물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어제저녁에 술을 좀 하셨으니 해장 겸으로는 어묵탕이 좋아 보였다. 나름 고생하여 내어 간 아침상에 시모는 대뜸 "조미료 깡그리 부었네"라고 말한다. 어묵탕 세트 사면 들어있는 그 봉지를 하나라도 썼으면 기분이 덜 나빴을까. 그냥 아침 하느라 고생했다- 라고 하면 안 되었을까.


나는 시모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제도 하루 종일 불평불만, 인상은 내내 찡그리고 대체 그 눈썹과 눈매는 웃는 날이 있는 건지 의심마저 되었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억양을 또 들어야 하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은 무슨 조미료냐- 국물 낸다고 고생한 사람한테 왜 그러냐고- 말렸지만 시모는 몇 번을 더 수저로 떠먹더니 "조미료 덩어리 구만 뭐" 라고 말한다. 네네, 너님 멋대로 드시던가_ 말던가_ 나는 모르겠다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불만만 말하는 시모의 얼굴을 잘 쳐다보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다. 좋은 말만 듣고 좋은 것만 보고 싶다. 그렇게 자주 시가에 방문하고 전화연락에 시달리면서 결혼한 이후 나는 좋은 소리보다 안 좋은 소리만 겪어왔다. 나마저 우울해지고 투덜이가 될 것 같았다. 저렇게 불만만 말하는 시모를 대처하는 방법으로 나는 쳐다보지 않는 것을 택하였다. 그 얼굴을 보면 나 또한 찡그려지기에 나는 그냥 그런 시모를 보지 않고 탁자나 바닥 등을 보고 딴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시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 가시방석 같은 곳에서 몇 번의 눈치를 주어도 불평을 다물지 않는 본인의 아내를 제압하지 못하고 겨우 나에게 나는 맛있다~ 좋다~ 라고 말한다. 그 말에 시모는 정말 맛이 없는지 "아니다. 뭐가 좋냐? 어이구 뭔 맛 이래? 조미료 먹는 건데 뭐 " 라고 하신다.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신혼집에 1박 이상 모시지도, 무엇을 해드리지도 않겠다고 말이다. 이로써 당신들이 먹는 마지막 며느리의 밥상이 이것이라고 말이다. 



행하시는 모습에서 마음이 더 가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로 아닌 경우가 있다.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다짐한다.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말아야지. 내가 더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싹도 올라오지 않게 만드는 것은 시모의 태도와 말투일 것이다. 나는 시가의 행사 명절 등에도 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이런 나를 욕하지 말아 달라. 원인은 상대방이 하였으니!



아침을 거의 치우자 시아버지는 아직 이른 시계를 보고 오늘 뭐하냐고 물으신다. 같이 어디 대부도나 강화도라도 나가서 바람 쐬자고 하신다. 나는 어제부터 정신이 다 털려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권하는 말에 대꾸할 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의 기분에서 함께 나간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묵언하는 내가 기분이 퍽 상해 보였는지 지쳐 보였는지도 모르고 시모는 대부도는 무슨 대부도냐며 오리배를 타러 가자고 하신다. 그런데 나가면 할 일이 없는데 뭐 놀 거 있는곳으로 가야 한다며 유원지 같은 곳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함께 나갈 수도 있었다. 그전날 그리고 아침에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면,. 아니 내가 며느리로서 모든 최선을 다하는 우리 엄마였다면 다 참고 모시고 대접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힘듬을 대물림받던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의사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시부모님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서 내 신혼집에서 나가시길 바랬다. 




시부모님들이 다녀가신 다음 주에는 남편의 친구들을 부른 집들이가 있었다. 집들이 덕에 시가에 방문하지 않았던 주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시가에 당연히(?) 갔더니 시모는 "너희 친구들 왔을 때도 그놈의 어묵탕 끓여주었었냐" 며 비아냥 거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오는 길에 남편에게 지랄을 했다. 어머님은 대체 왜 그러시냐고_ 그렇게 내가 해준 음식이 싫었냐며_ 그놈의 어묵탕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뭐냐고_ 왜 저렇게 비꼬면서 말해야 하냐고 말이다. 남편은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이해 못하겠다고 미쳐버리겠다고 말했지만 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남편은 그날 두 분이서 집으로 가시면서 얼마나 싸우신 줄 아냐고 말한다. 아빠가 며느리인 내가 힘든 거 다 이해하신다며 그날 시모가 했던 수많은 잘못된 언행에 대해 지적하고 다투셨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날 이해하시면 얼마나 이해하시고 내 맘을 느끼신다면 얼마나 헤아리실지 모르겠지만 시부가 뭐라고 할 만큼 시모의 언행과 행동은 잘못되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시달린 며느리가 웃으며 또 아무렇지 않게 당신의 부름에 달려왔건만 비웃으며 어묵탕을 언급하실 건 아니지 않나 생각했다. 여기서 내 음식 솜씨가 별로일 거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날 끊인 국은 시원했고 나는 웬만한 음식을 잘 해내는 편이다. 무엇보다 그 증거로 남편이 있다. 남편은 자신의 엄마 요리를 불신하고 내 요리를 찬양한다. 위생개념이 잘 정비되지 않은 시모의 주방보다 우리의 주방을 선호하며 장모님 음식이 베이스가 된 내 요리에 무척 만족하고 있다. 



시부모님이 다녀 갔던 우리의 신혼집은 내가 가장 좋아라 하던 공간이 맞는지 의심되었다. 시모가 만져보지 않고 언급하지 않은 물건이나 공간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에는 모든 물건을 볼 때마다 시모가 내뱉었던 멘트가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살림하는 재미가 없어졌다. 내 물건들과 공간들이 다 미워 보였다. 그냥 시모의 음성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모두 싸잡아 버리고 다시 집을 꾸미고 싶었다. 내가 발품 팔고 서치 하며 고르고 꾸민 우리의 첫 공간이 짜증 나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나는 진정한 투덜이가 되었다. 

시모의 멘트가 생각나면 남편에게 구시렁대었다. 이게 어쩐다고_ 이게 뭐가 맘에 안 든다고_ 이게 어떤 건데 갖고 싶다고_ 가져갈 거라 언포를 놓는 건 뭐며_ 사달라고 맡겨놓은 거처럼 할 건 뭐람_ 끝도 없는 나의 투덜과 궁시렁에 남편도 질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직도 시모의 언급이 생각나 열뻗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단 하루였다. 명절 이후 아내들의 스트레스에 남편이 백을 하나 사준다- 돈을 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충분히 그럴만하다 납득되었다. 묵묵히 자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어갔던 엄마가 속 터질 노릇이었다. 며느리란 그저 그런 것으로 나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말지. 



나는 엄마 같은 며느리는 못될 것 같았다. 속에 차고 넘쳐흐르는 분을 눌러 담는 그런 착한 며느리는 절대 못할 것 같다. 나는 적어도 남편에게 만큼은 발광을 했다. 이런 내가 싫고 화나면 원인제공부터 하지 말아 달라 말했다. 시가에 자주 가는 것도 많이 참고 있지만 앞으로 듣고 싶지 않은 말과 부정적인 언급이 있다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모의 연락은 계속된다. 네가 하도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 - 얼굴 본 지 오래돼서 까먹겠다 - 대체 뭐 먹고 사니 - 김치는 있니 - 


지난주에도 만났는데도 말이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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