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PCR 검사를 받으러 가다가 쓰러져 사망
"안녕하세요. 같은 초등학교 다녔고, 같은 반이라면서 2016년에 메일 보낸 오병철이에요. 얼마전에 문세경씨가 내신 책을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발견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연락합니다. 제가 시각장애가 있어서 오디오북으로 님의 책을 듣고 있어요."
지난 2월 16일, 위와 같은 메일을 받았다. 2016년에도 같은 이름으로 온 메일을 받은 적 있다. 그때는 '같은 초등학교 다녔고, 같은 반'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번에는 반가움이 앞섰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꼭 오병철을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 책을 장애인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오디오북으로 읽고 있다는 말에 감동도 받았으니 말이다.
▲ 2019년 8월 16일 장애인차별 발언을 한 국회의원들을 국가인권위에 진정하는 기자회견에 참여한 오병철(맨 앞).
메일을 받고 닷새 후인 2월 21일, 오병철이 소장으로 있는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내가 찾아 갔다. 오병철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력이 안 좋아져서 중증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 서서히 귀도 안 좋아져서 보청기를 낀다고 했다. 보청기를 끼면 웬만한 듣기는 가능하다고 했다.
어슴푸레 기억나는 오병철의 어릴 적 모습은 또래 아이들보다 확연히 구분되는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42년 만에 만난 오병철의 모습은 어릴 적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늙어 보이지 않았다(이미 초등학교 때 나이든 아저씨 같은 외모였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외모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꼬꼬마 어린이에서 같이 늙어가는 중년이 되었으니까. 그동안 살아 온 얘기를 쏟아내기엔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42년도 눈 깜짝할 새에 흘렀는데 말해 무엇하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시력이 나빠졌어. 눈 때문에 휴학을 했는데, 다시 학교에 가니까 학교는 이미 나를 퇴학 시켰더군. 그 당시에는 본인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학교에 안 나오면 자동으로 퇴학이었나 봐. 중졸 학력이 될 뻔 했지. 그래서 고졸 검정고시를 봤어. 대학은 방통대를 다녔고.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어서 성공회대 시민사회대학원에 갔어. 대학원 등록금을 어떻게 냈냐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문 컴퓨터 강사를 했어. 그일을 해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냈지.
중도 시각장애가 오고, 귀까지 잘 안 들리자 헬렌켈러가 된 것 같았어.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어.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인 내가 장애 때문에 차별 받는 일이 너무 많았어. 그때부터 장애인 활동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 2011년부터 송파솔루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에는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어. 생각해보니 정신없이 살았네(웃음)."
만나지 못한 42년 동안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23일 밤, 버릇처럼 페이스 북을 열었다. 어느 지인의 타임라인에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는 걸 보았다.
"(2월 22일) 오병철 동지가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모두 코로나에 확진이 되어서 장례식장에 못 오셨다. 어머니는 치매로……(중략)...... 여동생은 전화기 너머 울음 섞인 말로 유족인사를 전했다."
글을 읽으면서 내 친구 오병철과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보고 또 봤다. 그리고 첨부된 사진을 봤다. 내 친구 오병철이 맞았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지인의 타임라인에는 오병철의 부고와 함께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이 추모제를 여는 모습이 사진으로 첨부 되었다.
▲ 2월 23일 ㅇㅇ병원 장례식장에서 故 오병철의 추모제를 하고 있다.
▲ 2월 24일 오병철의 장례식장, 영정사진을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날인 24일, 엊그제 만난 오병철을 장례식장에 놓인 영정사진으로 다시 만났다. 기가 막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 볼 것도 없이 소리 내 울었다. 42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빨리 떠나면 어쩌냐고 울부짖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삼키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함께 일한 동료 활동가들에게 그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들었다.
지난주에 부모님이 모두 코로나19에 확진되었고, 같이 살고 있는 그도 감염이 의심되어 신속항원검사를 했다. 다행히 음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놓았는데 신속항원검사 받은 다음날 갑자기 기침을 많이 해서 여동생이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단다.
다음날 오병철은 출근길에 PCR검사를 받으려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 검사장까지는 2km나 떨어져 있었다. 비장애인에게 2km는 먼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중증시각장애가 있는 오병철에게는 천리 길이나 다름 없다. 혼자 그 먼 길을 걸어서 갔을 오병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오병철은 검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쓰러졌다. 지나가는 시민이 119를 불렀고,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심정지가 왔다. 그리고 사망. 사후 확진이었다. 누가 코로나19를 가벼운 감기라고 했나. 건강한 사람, 백신을 다 맞은 사람에겐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지만 장애인에게 팬데믹은 형벌이고, 감옥이고, 죽임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만난 지 사흘 만에 저세상으로 간 친구 오병철, 그가 떠났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해 빵집에 앉아 핫초코를 마시며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추억을 얘기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 오병철의 약력
만나자마자 이별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온라인에서 오병철을 찾았다. 그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6년에 그의 메일을 받고 바로 만났더라면 추억 몇 가지는 더 만들었을텐데. 그리고 그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여해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외쳤을텐데.
2016년 5월, 오병철은 지하철에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는 점자 안내선과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는 '점자 표시'가 없다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넣는다. 교육방송에 출연해 장애인 화장실 불편 사항을 알렸다. 2020년 3월, 정부 서울 청사 앞에서 오병철은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시청각장애인의 지원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은 접근성이 떨어져서 마스크 판매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손 소독제가 어느 곳에 비치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시각장애인도 사회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외출합니다. (중략)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특별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20년에는 EBS <내 인생의 이야기, 공부>에 출연한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걸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오병철을,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EBS의 <내 인생의 이야기, 공부> 인터뷰 마지막에서 오병철은 이렇게 말했다.
"2020년에는 제가 먼저 타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을 만나 편안하게 대화하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상대방을 편안하게 대하려고 하고 이야기 하는 게 생활이 됐어요. 20대 시절부터 제가 꿈꿔왔던 '내적치유상담'이나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 할 게 많았어요. 사회복지 공부를 대학교부터 했다면 상담 과정을 이미 끝냈을 텐데 2004년 방통대에 입학할 때는 사회복지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려고 대학원에 간 거죠. 작은 돌멩이 하나로 살아가듯 천천히 걸으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를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나도 너와 함께 천천히 걸어갈게"라고 말해줄 텐데... 이밖에도 오병철은 2021년 말 20년 동안 이용하던 점자 유도블럭이 아파트 재건축으로 사라지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사무국장 주정수씨가 오병철을 회상하며 말했다.
"오 소장과 2016년부터 같이 일했어요. 거의 가족같이 지냈어요. 오 소장은 추진력이 남달랐어요. 해야겠다는 일이 있으면 꼭 하는 스타일이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어요. 그리고 리더십이 있었어요. 그랬던 오 소장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42년만에 초등학교 친구를 다시 만난 설렘, 반가움, 고마움은 단 '하루'로 끝났다. 마치 기대와 흥분을 가득 안고 우주여행이라도 하고 온 기분이다. 다시는 하지 못할 시간 여행을 오병철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행복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