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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an 06. 2021

네가 양극성 장애라고?

 졸업한 지 2년이 된 P에게서 새해라고 연락이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동안 연락 못 드려 죄송하다, 코로나 끝나면 학교에 놀러 오겠다, 새해 인사를 전하는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른 내용이 없는 메시지 사이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제가 요즘 좀 힘든 일이 있었지만' 

 제아무리 졸업생이라지만, 또 이런 구절을 보고 그냥 못 지나치는 게 교사의 생리다. 그냥 아예 대놓고 콕 찝어 질문을 던졌다. 

 '고마워, 너도 복 많이 받고, 근데 힘든 일이라니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보통 졸업을 한 아이들의 연락 주기들이 있다. 수십 명이 함께 학급 안에서  정해진 시간표에 묶여 생활하다, 대학교에 가서 이제야말로 홀로 '자유'를 누리며 '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인이라는 걸 실감하며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3,4월. 이 때는 주로 '선생님, 고등학교 때가 너무 그리워요.' , '선생님, 교복 다시 입고 학교 가고 싶어요.' 라며 연락이 오고 이 이야기를 재학생들에게 해주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런 아이들 역시 졸업을 하고 3월이 되면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러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연락이 뜸해지다, 뜬금없이 연락을 하는 건, 십중 팔구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위안을 받고 싶은 경우이다. 

 

 제일 마지막으로 P를 학교 앞 중국집에서 만나 같이 짜장면을 먹었을 때, 한창 썸을 타는 친구가 있다고 했고, 두어 달 뒤 다른 아이로부터 P가 그 남자 애랑 사귄다고 얘길 들었던지라 남자 친구와 이별을 경험했겠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힘들고 그래서 정신과 병원을 찾아가 봤더니, 선생님 제가요 양극정 장애래요.ㅠㅠㅠ'


 뭐시? 


 내 기억 속의 P는 누구보다 학교 생활을 잘 해냈던 아이였다. 학기 초에 우리 반 수업이 있던 선생님들은 수업 후 내게 와서 

 "선생님 반에 진짜 대답 잘 하고 열심히 하는 애 있던데, 눈 크고 머리 짧은, 걔 이름이 뭐에요?" 라고 묻기도 했고, 공부를 아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성실하게 해내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밝았던 아이였다. 2학기 때는 학급 아이들로부터 몰표를 받아 학급 회장이 되었고 입시 전형들과 수능이 코앞에 있던 상황에서도 다른 아이들을 배려해가며 이것저것 학급 일을 챙겨 줘 담임으로서도 덕을 참 많이 봤다. 진학 면담 차 오신 P의 어머니는 늦둥이인 P가 집안 일도 톡톡히 해낸다며, 가끔 집을 비우면 빨래도 흰 옷과 색 있는 옷, 삶아 빨 것들과 아닌 것들을 구분해서 한다고 자랑을 하셔서, 어떻게 딸을 키우셨는지 노하우좀 알려달라고 내가 부탁할 정도였다. 

 졸업 후에도 가게를 하는 사촌 동생이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데 누구 아는 사람 없냐고 물어와 P를 망설임없이 추천했고, 사촌 동생도 성격 좋고 야무져 일을 너무 잘한다며 첫날부터 극찬을 해대 마음 한 켠이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양극성 장애' 라니? 


P는 '제가 학교에서 그렇게 즐겁고 신이 났던 게 양극성 장애였던 건가봐요. 흑' 하고 연이어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아도 P의 모습은 병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 깜짝 놀라 '양극성 장애'를 검색어에 넣고 증상들을 보아도 어느것 하나 P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요즘 정신과에서 진단명을 남발한다는 상담 선생님의 우려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전문가의 의견을 마냥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는 터, 뭐라고 위로를 하거나 용기를 주고 싶은데 딱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이 곳, 브런치. 


 '어떤 기준으로 그런 진단을 받았는지 몰라 뭐라고 함부로 얘기할 순 없지만, 예전에 상담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진단명이 낙인 효과를 일으켜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고. 너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을 떠올려보면, 설사 그게 진짜 병이라고 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을 거야. '

 

'그리고 너 글 써볼래?'


 '별 거 아닌 거 같고 하기 전엔 귀찮은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매일매일 감정들을 적다 보면 생각도 정리가 되고 마음이 개운한 느낌이 들더라고. 부담 느끼지 말고 그날 그날 네 감정들을 솔직히 털어놓는다고 생각하고 써 봐도 좋을 것 같아.' 


 '네, 안그래도 가끔 그냥 두서없이 뭐라도 써보긴 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뭔가 매일 매일 써봐야겠어요.' 


 '그래, 언제든 힘들거나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코로나 지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놀러와.' 라고 대화를 마무리 짓다 문득 떠오른 생각, 


 '야, 근데, 너 진짜 글 써보다 나중에 책 내라. 양극성 장애에 관한 학술 서적은 많은데, 너처럼 실제 겪고 있는 이들의 기록은 없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약점을 약점이라 감추고 그것 때문에 위축되지 말고 네 약점을 스스로 이용해 먹어. 그럼 그게 어느 새인가 너의 강점이 되어 있을 거야!!!'


 '우왓, 진짜 책 내는 걸 목표로 한번 써 볼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히히히히' 


 새해 연휴 내내 만사가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뒹굴대던 내가, P와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P의 모습을 상상하며 들떠 있는 걸 보니, 어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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