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을 지냈다. 하루 하루는 지난한 것 같아도 돌이켜 보면 그새 시간들이 훌쩍 흘러, 여기저기서 졸업생들이 스승의 날 전후로 안부 문자를 보내온다. 자기의 말을 잘 들어줘서 고맙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힘들 때 좋은 말을 해줘서 고맙다며 나와 함께 한 학창 시절을 언급한다. 애초에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아이들만 연락을 해왔을 것이므로 칭찬 일색의 문자뿐이다.
그렇다. 난 학교에서 누군가에겐 말도 잘 듣고 가능한 이해해 주려고 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도우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숙제를 잊어버리고 안 낸 애들에겐 그럴 수 있다며 웃어 넘기지만, 내 애가 숙제를 뒷전으로 한 채 종일 놀기만 하면 눈물 콧물을 쏙 빼놓게 호통을 치지 않고선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다. 학교에서 친구 문제를 고민하는 아이들의 눈을 응시하며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집에서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는 내 아이들의 말들은 귓등으로 흘려 듣는다.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남편의 지인의 지인, 졸업생의 가족까지 동원해서 방법을 알아보면서도 집에서 아이들이 '엄마~'하고 부를 때면 반사적으로 '아빠한테 이야기해!' 하며 등을 돌린다.
남의 아이들은 짜증을 내도 어리광을 부려도 귀여운데, 실패를 겪어도 옆에서 기다려 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내 아이에겐 안된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육아 전문가의 의견도, 그래서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영속적인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관계의 부담이 덜하다. 순간적인 공감까진 가능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그들 것이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다. 그러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이르면 그 거리감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일단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 세상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변화를 겪고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지, 언제 무슨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네 모습이 내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도 하고,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건지 너 때문에 사는 건지도 헷갈리곤 한다. 그런 삶 속에서 어찌 교과서적인 관계 맺음이 가능하랴.
대신 나의 아이는 친구들과, 친척들과, 이웃들과, 교사들과 만나며 자랄 것이다. 각자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여러 얼굴들을 바라봐주고 사랑해 주는 손길을 느끼며 성장해 갈 것이다. 내 애이기 때문에 줄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한 켠에 간직하고 있다면 엄마가 가끔은 괴물이 되어도 아이들은 용하게도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천사의 모습을 발견해 내곤 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란 유명한 말이 있다. 곱씹어 보면, 단순히 아이 하나에 도움의 손이 여러 개가 필요하단 의미가 아닌 것도 같다. 그 말 속엔 한 아이가 잘 커나가기 위해서는 온 마을에 있는 다양한 층위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 아닐까.
남의 애들에겐 하면서 내 애게만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은 그래서 조금은 내려 놓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