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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May 03. 2020

내가 찾는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주변에는 모래 사막이 대부분이고 주로 모래 바람만 불고 있는 이 곳에서도 이런 바람이 불다니!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면서도 포근하다.

창문 넘어 넘실넘실 들어오는 바람결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그러다 이웃집 아이의 웃음소리에 잠이 깬다.

항상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산발한 채 기저귀만  차고 뛰어다니는 이웃집 아이는 한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인다.

기분 좋은 낮잠이다.


할머니는 이런 바람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 찌우는 바람'이라고.


어떻게 바람이 살을 찌운단 말인가 어린 나는 피식 웃었다.

그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시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들 키우는 것이 중요한 우리 할머니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려니 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바람이 살을 찌운다는 할머니의 표현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기분 좋은 바람인가,

이렇게 살랑거리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나도 모르게 잠을 자다 일어나면 진짜 몸이 건강해진 거 같다.  


물론 살이 찐다는 표현에 질색하는 사람들도 있을게다. 요새는 살이라 하면 거부감부터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내가 보기에는 날씬한 사람들도 어디 구석에 있는지 모를 살을 빼지 못해 난리인데, 살을 찌우는 바람이라니. 하지만 우리 할머니 세대에게 살은 건강함의 표현이다. 우리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의 살에 대한 귀여움에 감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단잠을 자는 어린 손주의 손발을 주물럭 거리며 할머니는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바람아, 바람아 우리 귀한 손주 쑥쑥 자라게 해 다오' 하며 말이다.


할머니에게 살을 찌우는 바람은 비단 살랑살랑 봄바람뿐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내가 가장 좋은 하는 바람은 막 모내기한 어린 벼가 자라는 물이 찰랑 거리는 논에서 불어오는 초여름 저녁 바람이다. 


모내기 한 논에서 자라는 벼를 바라 보는 것은 어린 나에게도 뿌듯한 일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모내기 기계로 모심기를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기계로 하는 집과 직접 모심기를 하는 집들이 반반 뒤 섞여 있었다.  할머니 댁은 직접 모내기를 하셨다.  물론 내가 직접 모심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할머니 논에서 자라는 어린 벼를 보고 있자면 마치 내가 심은 냥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 논에서 불어오는 초여름 저녁 바람에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풋풋한 벼 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나는 초여름 그 바람을 참 좋아했다.


그런 바람이 싣고 오는 풀 냄새, 흙냄새를 킁킁 거리며 맡고 있으면 정말 어쩌면 할머니 말씀처럼 이 바람이 나의 키를 자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바람은 어린 벼도 키우고 나도 키우고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 생각을 하곤 했다.

더 크고 싶은 마음에 나는 바람을 한 가득 들어마시곤 했다. 


문득 초여름 그 바람이 그리워진다.

무수하게 많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지나왔지만, 어느 순간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살을 찌우는 그 바람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거 같다.


어린 내 곁에 항상 맴돌던 그 바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린 나는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뒷동산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오면 봄이 절정인줄 알았으며, 물기가 촉촉한 어린 벼의 냄새가 나면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바람 결에 햇볕의 넉넉함이 느껴지면 넉넉한 가을이 왔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정신 없이 뛰어 놀던 나에게 바람은 할머니네 아궁이 밥 짓는 냄새를 전해주어 저녁이 다 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 바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내가 도시에 살기 때문인가? 아니면 요새 무슨 날씨의 변화만 있음 탓하는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

아니면 순식간에 시원해지고 아무런 냄새가 없는 저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내 감각 때문인일까?


보이지 않는 바람결로 세상의 변화를 알려주던 그 바람이 그립다.


바람 하면 황사 바람을 먼저 떠올리는 우리 아이와 같이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 저녁 바람을 같이 맞고 싶다.

아이가 그 바람에 실려오는 풀 냄새, 흙냄새, 물 냄새를 나처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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