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막연하게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다음에 써야지 하는 그런 정도의 생각이다(가족정책을 연구하는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언젠가 '가족(정책)'에 대한 책을 써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부담감)이 있었다).
물론 나이와 경험이 그리고 지식이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시간이 흐른다면 왠지 내가 더 순해질 거 같았다.
순해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내 성격이 더 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이 시간이 흐르면서 순해지지 않을까 싶다. 해 질 녘 부는 잔잔한 바람에 실려 모든 사물의 경계가 순하게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그렇게 나의 생각과 시선에 경계가 없어지고 순해지길 바란다. 물론 장담할 수 없는 그냥 나의 막연한 바람이다.
아무튼 지금보다 (내 성격이건 내 관점이건) 더 순해진다면, 어쩌면 미묘하고 건들기 어려운 주제인 '가족' 이야기를 더 편안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나는 가족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족정책은 내가 사회정책 그리고 해당 복지국가를 분석하는 기준이었다. 물론 내 전공이 사회정책이라는 큰 배경을 갖고 있지만 내 연구의 주제는 항상 가족정책이다. 스웨덴에서도 내 주된 연구의 주제는 가족정책이었고, 지금까지 내 연구의 주제는 가족정책이다.
가족정책으로 논문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가족정책이 무엇인지 묻곤 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이 '가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와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은 무엇인가?
다양한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이며,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기제(機制) 혹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여성 혹은 취약한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합법적인 사적 공간이며, 비정한 사회에서 안락한 안식처이며, 복지국가는 가족이라는 단위의 공간을 국가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며,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정부는 가부장제의 확대로 해석되곤 한다.
이처럼 가족은 현재 국가 혹은 해당 사회를 분석하는데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의 집단은 가장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많은 정책가 그리고 학자들에 의하면 이 가장 사적인 '가족'은 종종 국가 혹은 사회를 움직이는 기제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정책의 지향점을 호소하거나 혹은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촉진시키는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단어와 '가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라는 점은 '가족'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은 해당 사회의 문화와 계층 그리고 젠더가 교차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가족정책을 연구할 때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바로 정책의 효과성이 문화와 혼재해서 나타날 때이다. 특히 가족정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가족'이라 하면 떠오르는 일정한 혹은 정형화된 상(像)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이미지:image)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 근간은 비슷하다.
'안식처', 돌아갈 곳, 쉴 수 있는 곳,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가족의 이미지는 막강하다.
이러한 가족이라는 공간은 철저하게 정서적으로 사적인 공간으로 국가조차도 침범을 할 수 없는 공간이며, 보호받아야 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과연 어느 부분까지 국가가 가족의 일(공간)에 관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민주주의 발전에 혹은 복지국가 발전에 논의 거리였으며, 해당 사회 혹은 정책 개입의 중요한 변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신성한(?) '가족'에 국가의 적극적인 관여를 의미하는 가족정책은 어느 국가에서건 해당 사회가 갖고 있는 가족의 문화(가족의 이미지, 가족의 정서적 가치 등등)와 첨예한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같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왜 국가마다 상이한 결과를 보이는지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정확한 용어와 형태로 그 존재를 그려 낼 수 없는(정의 할 수 없는) '그것'이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가족을 둘러싼 정책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책은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에, 이 이야기 역시 '가족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는 모든 가족들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다양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스웨덴 그리고 아랍에미레이트를 무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 이 세 곳은 내 주된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곳이다. 나 역시 정서적인 가족의 상을 갖고 있고,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족의 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내가 다른 공간(다른 국가, 문화)을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시점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곳이다.
스웨덴은 현재까지 내가 가장 많이 연구했던 곳이며, 가족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개입이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책을 통해 삶과 문화가 변화를 가장 선두에서 보여주고 있는 국가이다. 나는 이전 글(스웨덴의 저녁은 오후 4시에 시작된다)을 통해 스웨덴 정책이 얼마나 치열하게 스웨덴 사람들의 삶을 지켜주고 변화시켜 왔는지를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가족'에 초점을 두고 싶다. 스웨덴 가족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정책이 어떻게 그들의 가족들과 가족 안에 수 많은 '나'를 지켜주는지 살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랍(아랍에미레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국가들)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며, 대한민국 그리고 스웨덴과 많이 다른 문화적 국가적 통치체계를 보여주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운) 곳이다. 이 곳의 가족은 철저하게 사적인 공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사적인 공간의 규율이 공적인 그것보다 더 강력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의 '가족'은 아주 사적이지만 이들의 역사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나는 이 세 공간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정말이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미루고 미루다 하고 싶었다. 내가 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곳에서 '가족'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먼 여정이 될 거 같다.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지게 될지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떠할지 예측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을 둘러싼 이 세 나라가 보여주는 모순과 가치의 혼란이 나를 엄청 힘들게 할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그 혼란과 모순은 나에게 더 큰 생각의 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로, 나는 (그리고 나와 함께 깨어짐을 경험하는 당신은) 나아갈 것이다. 걸어 나갈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이 이야기의 끝에 나와 내 이야기에 기꺼이 동참해 준 여러분에게,
누군가 '가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해 질 녘 잔잔해진 바람처럼 순하고 편안하게 열린 생각으로 '가족'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