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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Sep 22. 2023

 엄마의 계절

- 바다라는 일터

오래 전 부터 나에게 주시겠다는 엄마의 일기장을 건네받았다.

당신의 인생을 가을이라 정의한 시기의 엄마의 일기를 옮겨본다.


2004년 1월 6일


지금의 나이 쉰이 넘어 인생의 반 고개를 넘었다. 나의 살아온 자취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 글을 적어본다. 인생살이 예측도 할 수 없지만 내일이란 희망 속에 역경을 넘고, 그 고행 속에 내 인생이, 내 삶이 부끄럽게 살진 않았는지 돌아보고 싶다. 요즘은 우리가 겪은 보리 고개에서 좀 나아진 환경이지만 물질만능주의 속에 이끌려서 내 삶을 거꾸로 살아가지 않았는지 한번쯤 과거 속으로 들어가 체크하여 본다.


요즘의 삶은 너무 쉽게 포기하고 빨리빨리 빠른 세월 속에 살아간다.  한번쯤 되돌아보면서 참은 인내와 용기와 희망을 안고 꺾기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겨 나갈 수 있기 바라면서 내 인생, 드라마를 적어본다.



나의 아버지는 2 대독자였다. 나는 장녀로 태어났다. 나의 기억은 아버지 따라 영도 동삼동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댁 제사를 지내려 가는 것부터 떠오른다. 지금도 이 사진은 남아있다.

한복에 방울목걸이에 머리에 핀을 꼽고 순애동생과 아버지 따라 영도다리 건너서 제사모시고 명절 때마다 간다. 참 칭찬도 많이 들었다. 복이 많아 잘 될 것이라고. 근데 왜 엄마는 안 가시는지 몇 해를 다녀도 엄마하고 다닌 기억이 없다. 


우리 가족이 영도 살 때 내가 초등학교 한 2학년때쯤 일거 같다. 미국의 원조를 받아 강냉이죽과 옥수수가루를 배급받는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 집엔 친 할머님과 아버지, 엄마. 큰외삼촌, 나와 동생이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군대를 두 번 갔다 오셨다.

한번은 탈영하였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다시 또 군에 가셔야했다.


친할머니는 해녀였다.

 친할머니 바다에서 잡으신 것으로 우리 생계를 이어가셨다.

2대 독자에 손녀라고 참 귀하다고 나의 똥도 받아 지붕위에 말려 건강하라고 물에 타서 마시게 하고 쥐를 잡아 숯불에 구워 나에게 약처럼 해주신 할머님. 그때는 모르니 똥도 먹고 쥐도  먹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집에 계실 때 비녀 꼽은 할머니의 얼굴이 지금은 알쏭달쏭하다.


초등학교 3 학년 때의 일이다.

조그만 담장이 있는 쪽에서 뛰기놀이, 그러니깐  누가 멀리 뛰어 내리나 친구들과 내기를 하다가 그만 하수구 옆 모퉁이에 떨어져서 눈 위에 큰 상처를 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상처. 그때 할머님이 치료해주신 기억이 있다. 피가 많이 흘렀다. 그 당시 병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빨간약에 그래도 눈을 피해 바로 위쪽에 찍혀진 상처였지만 그땐 제법 큰 사고였다.


얼마 지나서 학교에서 식구가 많은 사람 손을 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난 얼른 들었다. 식구가 아무튼 외삼촌까지 많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들었지만 몇 일이 지나니 가족이 와서 배급을 타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오셔서 강낭콩과  알량미 쌀과 우유, 강냉이, 콩, 밀가루 가루등을 받았다. 2개월 정도의 양식이었다.


아마 난 그때부터 집안의 살림살이를 걱정한거 같다.

할머님과 엄마의 웃는 얼굴, 이 곡식이면 두 달 살 수 있다고 하신 할머님.

이제는 멀어져가는 추억이다.


아버지는 군대갔다 오신 후로 직업이 없으신 거 같다. 저녁으로는 술 취해 들어오시고.

친할머님과 엄마 생활은 당연히 어려웠다. 아버지는 안 벌어 오시고 두 분이 그럭저럭 하루 하루벌어서 살았다. 일터란 바닷가였고, 살림의 대부분을 할머니께서 책임지신거 같았다.


영도 산꼭대기에 리뻥판자집으로 이사를 하시고 친할머니께서 병이 나셨다.

요즘 같으면 관절염이란 병인데 그때 주마등병이라 했다. 

학교도 난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쯤이다. 

할머니 무릎에서 고름이 많이 나와 엄마와 난 할머니 다리에 솜을 넣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저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헌 옷들 주워다가 할머니 기저귀로 썼다.

병원에 갈 수도 없는 형편에 약간의 소독치료만 할 수 밖에 없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엄마와 난 이송도 바닷가로 씻으러 다녔다.


한번은 비 온 뒤 파도가 많이 쳤지만 그때는 물도 귀하고 바닷가에서 빨아오면 말려서 쓰고 살았으니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엄마와 난 기저귀를 빨고 있는데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 엄마는 사라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큰 바위에 잡고 계셨다. 파도에 휩싸인 것이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데 파도가 휩쓸려 가다가 큰 바위에 걸려 엄마는 살았다.

지나가는 사람의 손길 아래, 무사히 엄마는 구출되고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힘들게 빤 빨래와 기저귀는 다 휩쓸려 가고. 


엄마와 난 맨손으로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너희 할머니 위독하시다. 아무래도 오늘밤 넘기기 힘드실 것이라 하시면서 아버지 찾으러 가시고 친할머니는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니 나는  할머님 곁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친 할머니는 아버지 얼굴도 못 보시고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불쌍한 할머니. 임종할 때 나 혼자였다.


일찍 할아버지 여의시고 외아들 잘 길러놓으시고 호강한번 못하시고. 거센 물결 바다와 인생을 살아오신 할머님. 친 할머님의 인생. 이렇게 끝이 났다. 초상을 치르고 우리 집 위의 공동묘지위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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