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속된다는 것
며칠이 지나 아버지께서는 어디를 가시는지 또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영도 어느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지 저녁으로 오시고, 영도 영선국민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난 학업이 거기까지다. 4학년.
또 며칠 만에 엄마께서 못 벌어 오셨는지 강냉이 죽거리도 가져오시지 못하고 울고 계신다.
하루, 이틀, 나와 순애 동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난 산에 가서 쑥을 캤다.
그날 저녁 쑥을 넣고 소금 넣고 아궁이에 나무 넣고 한솥 끓였다.
한 그릇씩 그냥 마셨다. 쑥 건데기 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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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너무 고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엄마가 보리가루 2되를 사오셨다.
보리가루로 수제비 만들어 주시는데 이것은 정말 쑥 풀보다 더 맛이 없다.
나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보리띵기. 이것 아마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소금넣고 맹물에 펄펄 끓였다. 정말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이때를 한번씩 생각하면 쌀 한톨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했다.
제2송도 언덕위에 살다보니 바닷가에 내려가서 쥐꼬랑댕이, 까사리와 파래등을 뜯어와서 보리쌀과 죽도 끓여 먹고. 한 일 년을 버틴거 같다.
어느날 작은 외삼촌께서 쌀을 조금 팔아오셨다.
큰외삼촌도 계셨는데 병이 나서 마산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그때에 무슨 병인지 확실히 모르겠고 엄마와 난 큰 외삼촌 보러 병원에 가니 침대가 쭉 있는데 환자가 20명도 넘는거 같았다. 그 후로 이병원에서 큰외삼촌은 돌아가셨다.
큰 외삼촌에게는 딸이 있었다. 정자였다.
아무튼 2송도 우리 집에 그때는 데려오지 않았다.
이송도 꼭대기에 있는 큰 외삼촌 무덤, 쭉 내려오면 친할머님 무덤.
한번씩 가서 찾아뵙고도 싶건만 세월이 흐르니 친할머님 묘는 공동묘지 따닥따닥 붙어 헷갈려서 알아볼 수가 없다. 큰외삼촌 묘도.
어느날 찾아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 묘인줄 알고 다녀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때 그 시절 구수한 쌀밥의 한 끼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또 꼭대기위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순남이 동생이 태어나고 막내여동생 순희까지 태어났다.
물을 한통을 길어 오려면 제일 꼭대기에서 받아 이고 내려오는 돌계단들. 그래도 다행히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이집에서 사라호 태풍도 잘 견디었고.
초량에 사시는 이모님께서 한번씩 오셔서 돈을 조금씩 주고 가시는거 같았다.
제2송도 윗길위에 살다보니 바닷가에 내려가서 쥐꼬랑댕이와 까사리와 파래들을 뜯어와서 보리쌀과 죽도 끓여 먹었다. 이집에서 외할머님과 가끔 오시는 외삼촌과 밥을 먹곤 했다. 외 삼촌은 한해가 다가기 전에 아미동에 있는 대학병원 담에 판자가게들이 많이 있는 가게를 열어주셨다.
대학병원 환자 가족들. 인턴들. 점심시간이면 국수와 우동 비빔밥을 파는 장사를 엄마가 하시게 되었다. 순희 동생부터 내가 업어 키운다. 나의 엄마는 동생들을 키울 시간이 없다.
순희 동생을 업은 채로 시장을 보아다 주고 물도 길어다 주어야 하고 엄마의 일을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13살 내 나이에 물동이를 하루에 몇 번씩 이고 날라야 했다.
저녁 늦게 쯤이면 가게 앞에 담요 깔고 검정고무신과 게다들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나의 또래들과 함께 돌멩이 공기놀이, 시마차기 등을 하며 놀았다. 참으로 먹는 것 걱정하는 것 없으니 좋았다.
엄마가 가게를 마치면 가게 안에서 나무 의자 길다란 것 펴고 아버지 엄마 나 동생들 그렇게 잤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도로가에 여러가게 분들과 함께 누웠다. 도로위가 방이 되었다. 그때 차를 한 대 정도 볼려고 하면 한참 있어야 했으니 나름 아늑한 잠자리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