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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Sep 24. 2023

엄마의 계절

-몰아쳐 오는 삶의 무게들

시장을 보면서 한푼 두푼 다라이 안에 모아둔다.

쌀도 한 숟가락씩 아껴 단지 속에 모아서 엄마가 쌀사오라고 하면 나의 단지 속에 쌀을 갖다주고 쌀 판 돈을 이렇게 조금씩 모아뒀다.


공민학교가 중학교로 바뀌는 바람에 5학년 최선생님과 김선생님과 이별을 했다. 

사회시간이면 김선생님, 날 책을 읽게 하신 선생님.

국어시간이면 나의 옆에 와서 자세히 가르키신 최선생과 이별이었다.  

지각하여도 꾸중한번 안하시고 공부시간에 졸고 있어도 눈감아주신 선생님 두분.

이분들 덕분에 난 이렇게라도 한글이라도 터득하게 되었다.


아미초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1년 과정을 하게 되었다.

야간부. 일 년과정.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참 많이 울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니 중학교를 보낼 생각이 없으신지 형편상 안되는 것인지 많은 식구들 때문에 난 이렇게 학교와의 인연이 끝나게 되었다.


너무나 공부하고 싶어 강의록도 사서 저녁으로 읽고 한자 공부도 동생을 업고 조금씩 배웠다.

나의 동생 순애라도 중학교에 보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얼마를 졸랐다. 그렇게 해서 순애는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아미동 꼭대기에 방을 얻어 사시고, 가끔씩 가물면 내가 물을 이어다 주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한 날 순애동생의 교복을 너무 입고 싶어 저녁에 경숙이 친구랑 난 교복을 몰래 훔쳐 입고 야시장에 내려갔다. 야시장에서 동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동생의 교복을 입고 얼굴 빨개진 나의 모습. 나를 놀리며 비웃고가는 저 아이들 뒤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못배운 것이 한이 되었지만 선샌님이 꼭 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꿈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우물가에 가서 남보다 먼저 일어나 끌어다 가득가득 단지에 채워놓고 이 우물이 가물면 법원 앞까지 가서 물통을 이고 길어왔다. 단지에 물이 가득가득 찰 때마다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연탄 배급받는 날이면 빨래판 위에 다섯 장을 이고 와서 차곡차곡 쌓아두면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열장도 이고 갈 수 있다.


우리 집 밑 우물 옆에 사는 영희친구의 머리를 잘라주려 하는데 빨래판 엎어놓고 앉히고 가위로 머리를 잘라주는데 왼손잡이인 내가 사고치고 말았다. 단발머리를 짝재기로 만들어 놓았다. 한달동안 영희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때 나도 나지만 영희가 얼마나 마음 상하였는지 모르겠다.


술 찌꺼기를 자주 사다 동생들 끓여먹인다.

토성동 한전 옆에 맥주공장인지 소주공장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300환어치 사면 한바게쓰를 준다.

술찌꺼기 사와서 신화당 소금 넣고 한 대접씩 마셨다. 우린 그걸 마시고 잘 때 보면 얼굴들이 발게져있다. 지금 같으면 간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동생들이 술을 잘 마시는거 같다. 나 역시 이때에 큰 간식이다.


어느날 명구 동생이 열이 너무 많이 났다.

그러더니 눈동자가 막 돌아간다.

동생을 업고 동네병원을 가니 폐렴이 심해  큰 병원으로 가란다.

큰 병원에 갈 돈이 없다고 엄마는 그러시고 동생을 업고 충무동 소문난 침집으로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다려야 하는데 애원 애원해서 새치기 해서 4시간가량 침을 맞혔더니 동생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 생각하면 신기하다.  한푼 두푼 모아둔 돈이 동생을 살렸다. 친할머니 말씀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눈동자가 제자리로 오지 못했을거란다.


엄마가 자꾸 아프시다.

이런 와중에 막내 명룡이가 태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한의원에 엄마를 모시고 가보잔다. 결과가 하혈을 많이 해서 하혈 멈추는 약을 4첩 지어왔다. 나의 모아둔 돈이 엄마 약값으로 귀하게 쓰여진다.


숯불에 연탄불에 정성들여 달여 얼마동안 괜찮으시다가 자꾸 쇠약해지신다.

하혈은 거듭되고 엄마와 나는 충무동 제일 산부인과 병원에 갔다.

진찰실에서 보호자를 부른다.

어른이 아닌 내가 들어가니 원장님께서는 아버지를 모셔오란다.

지금 대구에 일하러 가신고 안 계신다고 결과를 말씀해달라 하니 원장선생님께서 현미경을 보란다.

너무 놀라 이것이 무엇이야 물으니 자궁암을 방치해서 병속에 고름 같은데 작은 벌레들이 보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징그러웠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할 수 있는 치료는 하루속히 방사선 치료밖에 없단다.

서울이나 대구 동상병원으로 모시고 가란다.


6개월 사형선고였다.

엄마가 6개월 밖에 못산다는 말이 무엇인지 암이 무엇인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와 나는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친척이 있어 의논하겠나...

외삼촌 한분 계신데 외할머니 편찮으시고 동동구르무 장사해서 겨우 겨우 끼니 연명하시고 계시고, 우리를 조금씩 도와주시던 초량에 계시는 이모마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셨다. 그 이모는 나 데리고 가서 공부시키겠다고 약속까지 하신 이모였다. 그러나 이때 안계셨다.

단지 무기력한 아버지 밖에 없었다. 또 한의원가서 약을 몇 첩 지어와 다려드렸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식구의 생계가 달려 있는 가게가 철거된다.

1차.2차. 강제 철거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 울분과 가난의 분노의 울음도 소용이 없었다.

청천벽력. 이것이 벼락이었다. 

준비 안 된 현실에 나의 눈앞이 캄캄했다.

엄마와 동생들, 이제 어떻게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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