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정 Sep 25. 2023

엄마의 계절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는 동생들의 엄마가 되었다.

며칠 후 엄마가 아미동 꼭대기에 있는 월세 가게를 하나 얻으셨다.

엄마는 가게에 도우미라고 할까? 옛날에 있던 이모라는 아가씨와 저녁으로 가게에서 장사했다. 술을 이어다 주어야 엄마가 판다.


충무동 밀주 주가가 한참 멀다. 하루에 한번 내지 두 번정도 하혈을 조금씩 하시면서 장사를 하신다.

물통이에 막걸리 5되 내지 어떤 때는 한 말이다.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한 바가지라도 조금 더 얻어오는 날이면 출렁 출렁 쏟기는 날엔 내 이마와 몸속에 탁주 냄새가 주룩주룩 내려온다. 생각을 하다가 어느날 바가지를 거꾸로 팍 엎으니 거짓말처럼 흘려내려오지 않는다. 땅으로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동생들 옷과 기저귀와 먹을 것을 챙겨야 했던 나.

큰 남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난 입학식에도 가보지 못했다. 시장보아서 엄마한테 갔다 준다고.

가난의 굴레에서 병마와 싸우시는 엄마. 막내용이는 엄마와 함께 있다.

생각다 생각다 너무 아타까운 현실앞에 몇날 몇일을 사연을 적어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 이웃에 사는 태룡이한테 편지를 부탁했다. 나의 글씨가 엉망이라 태룡이가 다시 써서 3통을 썼다. 한통은 법원 옆의 큰 집에 던지고 또 한통은 중앙동 자가용안에 던지고 나머지 한통은 토성동 한전앞에 던져놓았다.


자궁암과 싸우니는 엄마.

하루 하루 편지 기다리는 나의 어린 마음 내 생각뿐이었다. 오직 엄마를 살려야 된다는 희망뿐이었다. 어쩔 방도가 없었다. 가난에 헤어나지 못하는 형편에 아버지께서는 생활비조차... 

 엄마 가게를 그만 두시고 아버지께 엄마 대구 동상병원에 가보야겠다고 말씀드리고 이웃에 돈을 조금 빌리고 대구동상병원에 갔다.


처음 타보는 기차다.

하숙방을 한달 계실 곳을 구해놓고 방사선치료, 통원치료 다니시기로 하였다.

엄마의 방사선 치료 받는날 엄마의 아픈 신음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치료 받는 순간에도 잘 참으시는 엄마. 난 엄마를 두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동생들 끼니와 엄마의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친구 말선이가 감만동에 있는 동명목재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준다고 했다.

말선이와 나 동생 순애랑 취직하러 가서 나만 합격하였다.


야간 일주일, 주간 일주일, 노동이지만 보름에 한번씩 봉급을 준다하니 이때의 나의 마음은 날아가고 싶은 기쁜 마음이었다. 주간 때에는 동생들끼리 낮에 있고 야간 때에는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해야 하니 하루에 2시간 정도 밖에 못잔다

.

한달 만에 엄마한테 가는 날이다. 일하는 날이 하루비면 병원비 쓸 값을 챙겨서 어머니에게 간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조금 더 마련하여 주신다. 대구로 향하는 나의 마음 보고픈 엄마께서는 좀 괜찮아지셨겠지 하는 기대와 막상 도착하니 여윈 엄마 모습. 돈이 떨어져 치료도 받지 못하셨단다. 쌀도 떨어지고 하숙비도 빌려있고. 15일치 비용을 준비해주고 엄마 곁을 또 떠나온다. 결국은 나의 엄마는 치료를 멈추고 부산에 내려오시면서 차기가 없어 나의 윗도리 하나를 팔아서 차비에 보태어 내려오셨다.


퇴근하여 오니 엄마가 와계신다.

엄마가 집에 계시면서 그 아픈 몸으로 나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신다.

점심을 먹는데 너무 좋아 울음이 막나온다.

몇 달을 다녀도 점심 한번 싸가지 못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엄마 이제 일어나지 못하신다.

퇴근하고 오면 엄마 물수건으로 닦아드리고, 기저귀 빠는데 물위에 하얀벌레가 떠오른다. 눈에 보인다.

지독한 피, 고름냄새와 너무 불쌍한 우리엄마.


어느날 퇴근하고 오니 먼 친척되는 고모와 엄마께서 대나무 하나를 잡고 징을 두드리고 나의 미래를 말씀하신다. 앉지도 못하신 엄마가 이것이 나의 엄마가 나의 미래를 점춰주시는 유언이 될줄 이야.

이제까지 살아보니 나의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셔서 그랬을까? 

시집 늦게가라. 그리고 재출로 가야 나의 배필을 만난단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알쏭달쏭 풀지못할 그때의 마지막 엄마 말씀.


엄마는 7남매를 남겨둔 채 그 후 3일 뒤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퇴근하고 오는 나를 꾸중하신다.

늦게 왔느냐고 . 엄마가 오후 3,4시사이 돌아가셨단다. 

엄마 얼굴보러 들어가니 엄마하고 부르는 눈을 뜨신다.

약을 2첩 빨리 지어오라 하시면 너희 아버지랑 어찌 살아갈래? 하시면서 턱이 내려 앉는다.

임종을 앞두고 나를 기다린다고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더 이상 엄마곁에 있지 못하게 무서움을 주시는데 동생들과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엄마나이 39살. 나의 나이 20살.


우린 그렇게 엄마를 보내드렸다. 이 슬픔과 이 가족은 난 그때 어깨위에 커다란 짐을 이게 되었다. 


삼일장 . 엄마의 뼛가루를 당감동 뒷산에 뿌리고 내려오면서 난 결심했다. 엄마처럼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 마음에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의 장례는 우리방에 빈소를 차리며 진행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