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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Sep 26. 2023

엄마의 계절

슬픔을 삼켜야 하는 이유

며칠 뒤에 또 직장에 나아야했다.

감만동에 있는 동명목재 공장.

통근차를 놓치면 차비가 없어 참 많이도 걸어서도 다녔다.


어느날 순애동생이 가출했다.

중학교 3학년에 졸업도 못한 채 집을 나갔다. 이곳 저곳 찾을 길이 없었다.

먹고 사는 생계가 나의 길을 막고 있으니 더 이상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나의 엄마는 9남매증 막내였다.

위로 이모가 있다고 하고,  일본에 계신다는 삼촌은 그 행방을 모른다. 이분들은 다 돌아가시고

동동구리무 장사하시는 작은 외삼촌 밖에 안계시는데 얼마 있지 않아 외삼촌께서도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는데 시립병원 영안실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는데 외삼촌이 계셨다.

장례를 치를 형편이 외숙모에게도 없었다. 가마니에 둘둘말아 동에서 나오신 분들이 삼촌을 메고 동삼동 공동묘지에 묻히셨다.


반송에 철거민들 이주해서 천막치고 사는 집에서 외할머니만 남겨둔 채 또 한분이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오시지 않으셨다.

지금 외숙모가 데리고 온 은자, 근자, 그리고 삼촌의 자식 정애, 정일이는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엄마 빈소에 보름에 한 번씩 밥 얹어 놓고 절하고 어느덧 1년 지났다.

엄마 돌아가실 때 막내용이가 세 살 젖을 먹을때이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1년 탈상을 지냈다.


우리 집은 도랑위의 판자집이다.

큰비가 오면 우린 항상 불안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동생들과 피신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삼촌 뒤쪽에 묻히셨다.

불쌍한 외할머니. 9남매 자식을 모두 다 앞에 보내고 마지막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동명목재 이교대날 이날 야간반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마음은 집으로 아버지께서 동생들과 피신하셨을까?

요즘같으면 전화가 있으니 걱정 없지만 이때는 연락할 수가 없다.

아침에 퇴근하고 우리집 가까이 오는데 소방차가 두 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혹시...

우리 집은 온데 간데 없고 거센 물결만 도랑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집과 9채 집들이 모두 떠내려간 줄 알았는데 4집은 무너지기만 하였고 우리집은 없고 아버지와 동생들 보이지 않는다. 비는 그쳤지만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 틈 속에 아버지와 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학병원 임시뒤쪽에 수재민들을 그리고 옮겼단다. 뛰어가니 아버지와 동생들 모두 무사했다.

엉엉 울음밖에. 기뻐서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자꾸난다. 워낙 피신 훈련이 잘되어서 다 살아 있다.

아버지 말씀이 도랑물이 너무 거세어 일찍 동생들 데리고 밖으로 나오셨단다. 그리고 얼마후에 집이 떠내려갔단다. 그날 저녁 옷이 있나 그릇이 있나... 몸들만 있고.

동에서 우리식구 많다고 밀가루 5포대와 미국 사람들이 보내준 옷을 줬다. 이 구제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원피스와 겨울셰터를 이 한여름에 입으라니.


대학병원 임시 피신소에 하룻밤을 보냈다.

아버지 말씀 큰 장대비가 너무 많이 내려 도량 넓이가 우리 아버지 키 5배 정도인데 동생들과 나와서 있는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난 어쩌다 한 번씩 가본다.

복개되어 길이 된 길. 옛 추억의 우리집터.


지금 나의 신랑이 동명목재 같은 부서에 있을 때 그냥 그냥 인사정도 할 사이인데 수해당한 우리를 찾아왔다.

회사도 못하고 하니깐 찾아왔나 생각했다.

우리 집이 떠내려갈 때 일부가 아래 영희 집쪽으로 떠내려 오면서 옷 조금 , 그릇 조금 스텐 다라이, 사진 몇장을 건져 흙투성이 옷을 씻고 있는데 온 것이다.

정말 미안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연탄난로와 라면 빨래비누를 사주고 동생들 호떡을 사주었다.

그 고마움에 난 그때 이성에게 끌렸다.


동명목재 다니면서 부서안에서 우린 아마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 야간 때엔 도너츠를 먹으러 가면 보기도 하고 한번은 자취하는 방에서 냄비에 하얀 쌀밥을 해서 줬는데 친구랑 참 맛있게 얻어먹었다. 일도 잘하고 키도 크고 여차 여차 마음을 쌓아가고 있었던거 같다.


아버지는 경비하는 일을 하신다면서 어디론가 또 가셨다.

대학병원 임시병원에서 있은지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집에 들어오는 도랑위에 집은 세면공골이 바닥이 되어 있었다. 집이 있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2번 째집  갈데가 없고 돈도 없고 집이 없는 우리는 세면공터에서 밤엔 별들을 보고 자고 낮엔 뿔뿔이 제각기 돌기도 하며 지냈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우린 그렇게 28일을 지냈다.

비라도 오면 큰일이다. 


회사에 결근을 하고 세집을 보러다녔다.

식구 많다고 주기 않고 참 많이도 다녔고 셋집을 얻기가 너무 힘들다.

아미동에서 초량까지 꼭대기에 주인 살지 않는 방이 한 칸 있어 달세방을 얻었다.

우리 형제는 이렇게 이사를 오게 되었다.


똘방구 엄마의 소개로 세째 순남이를 말고기 장사하는 집 양녀로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모른채. 가슴아픈 이별이라기 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설 수 밖에 없다. 태어나서 먹는 것 걱정안하는 집이라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찾아 오셨는지 이사 간 집으로 찾아오셨다.


엄마치료비 모자라 이웃 두 집에 빌린 거 갚지 못한 채 동명목재공장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 어려운 가정에도 지금 나의 신랑한테 마음이 가가고 신랑 자취 생활하는 자취방에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다. 동생들 놓아둔 채.

낮에 동생들 빨래 정리하고.

한명도 아닌 남은 동생들을 책임져야할 내가 앞도 뒤도 생각한번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신랑과 함께 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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