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에게는 혈육이 두분 계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이모'는 중앙동에서 꽤 괜찮은 다방을 하셨다. 어린나이에 동생들 키우며 어머니 장사를 돕는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기셔서 자주 다방으로 불렀다. 다방으로 올 때는 막걸리 받으러 가는 주전자를 가지고 오게 했는데 술을 받는 척 하면서 몰래 몰래 그 주전자에 돈을 조금씩 넣어 줬다. 몰래 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어머니의 눈초리 때문이었다.
아편 중독 자인 남편은 이상처럼 시를 쓰지도 않았으면서 매일 저녁 아내가 사오는 아편 만을 기다렸다. 생김새도 이뻤고 차분한 성격에다 공부 머리가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이모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공부 꼭 시켜준다.'는 약속을 여러 차례 했다. 구체적으로 입양까지 거론되었으니 이모가 어머니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더 이상 말 안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약속보다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웠을까? 모진 시집살이와 아편 중독 남편을 둔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한 이모는 목을 맸다.
남은 한 분은 어머니에게는 삼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렸을때 일찍 일본으로 가셔서 한국말을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으셨다.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 할아버지를 ' 일본 외할아버지 삼촌'이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불렀는데, 나의 기억 속에는 국제 전화로 한번씩 우리 집에 전화를 하셨던 장면이 남아 있다. 일본어를 모르시는 어머니였고 한국말을 잊으신 할아버지는 서로의 이름 만 부르다 전화를 끊곤 했다. 그 할아버지는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지만 어느 순간 생사 여부도 알 수 없게 인연이 끊어졌다.
그렇게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뒤에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3대 독자셨으니 일가 친척이 있을 리 만무 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없는 채로 단촐한 7 남매가 유일한 가족의 전부인 상태로 삶을 살아오셨다.
어머니의 삶을 들을 때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마음이 아파서 울기만 했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 그 때 어떻게 하지 그러셨어요~" 라는 선 넘은 평가들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어머니가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헤쳐 나온 삶을 스스로가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 지를 조금 이나마 알게되었으니깐.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 할 뿐" 인 시간을 보낼 터인데 어머니는 치열하게 '살아내셨'으니깐. 이제 나의 마음 속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을 기어이 해 내신 어머니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이젠 마음 속에 가득차 있다.
아! 그래서 어머니는 재출로 시집 가셨냐고?
신이 내렸지만 어머니의 선택을 결정해 줄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불행히도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신내림 소리와 다르게 몇 년 뒤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쌀 반가마니를 들쳐 업고 나타난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집안은 가계도를 몇번을 그려도 헷갈릴 만큼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숫자 만큼의 다양한 사연들이 있었다. 그 다양함은 어머니에게 또 다른 형태로 삶의 무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