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관점의 변화가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에도 근육이 있는지 하던 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려 듭니다. 부모로서 제가 가진 믿음도 쉬이 바뀌지 않았는데, 이 점이 저를 피곤하게 하곤 했습니다. 똑같은 관점으로 푸는 문제는 늘 같은 답만 도출하게 합니다. 그러다 논문 한 편을 읽었는데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느껴졌습니다.
Battling the tiger mother: pre-school reform and conflicting norms of parenthood in Singapore
논문은 싱가포르 학부모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싱가포르는 전통적으로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고수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학생 중심 교육 과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개혁 열풍이 일어나면서 부모가 과도하게 사교육에 의존하거나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을 터부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는 부모에게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곳이라고 여겼던 싱가포르도 입시 위주의 교육 문화에서 벗어나고자 개혁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혁의 논지가 한국과 거의 흡사합니다. 알고 보니 싱가포르도 유교 문화권의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과 비슷한 교육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홍콩, 일본 등등 유교 문화권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한 문제를 개혁하고자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유교의 집단주의적인 특성을 줄이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교육 문화를 뿌리내리고자 동아시아 전역이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서기 600년 경부터 유교는 과거제도를 통해 엘리트 국가 관료를 선발해왔습니다. 이런 유교문화 아래서 개인은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성공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공부’는 곧 ‘시험을 준비하는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열심히 해서 시험을 잘 보고 신분 상승하는 것이 공부의 최대 목표로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는 외부적인 요소 즉, 부모님의 기대나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인 배경과 지원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습자는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만 할 것을 종용받으며, 학습 과정의 모든 책임 또한 학습자 개인에게 지워졌습니다 (Cheng 2014).
문제는 이런 학습의 방식이 21세기 사회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4차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방대한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가공해서 개인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창의성과 응용능력을 활용하는 기민함과 자기 주도성을 얼마나 갖췄는가 이기 때문에 기존의 대량생산적이고 상명하복적인 교육으로는 그런 능력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학습의 동기를 외부에서 찾던 관습을 버리고 학습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발화에 더 초점을 맞추려면 교육의 성격이 변해야 합니다. 문제는 시대적인 요구는 이렇다 해도 현실에서 학교 교육의 형태와 입시의 성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거나 더디게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험의 기본 형태와 평가의 기준이 과거에 묶여 있으니 학생과 학부모는 그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규칙이 변하지 않으니 개인의 선택도 그 규칙에 맞추게 됩니다. 그런 어려움이 싱가포르 학부모 인터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싱가포르 학부모들은 대부분 아이에게 과도한 사교육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고 고쳐야 할 점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학생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대해서도 찬성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시 체제였습니다. 싱가포르 입시는 한국처럼 여전히 개혁의 범위가 좁았습니다. 여전히 입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를 풀고, 시험에 대한 경험을 여러 번 쌓고, 학원을 다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원에 보내지 말라고 하지만, 학원에 다닌 아이는 학교 성적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학원에 보내면서도 마음은 몹시 불편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편치 않은 선택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논문의 저자는 이런 싱가포르 부모들의 상황을 Double-binding effec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Bach 2017).
제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 현상에 double-binding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자관찰하는 관점이 달라진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 부모로 살면서 저도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 늘 딜레마를 겪었습니다. 어떤 학원을 보낼 것인가, 어느 정도면 과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정도만 보내도 아이가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학원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계속 의존만 하게 되지 않을까 등등 명확하게 떨어지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갖게 된 이유가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엄마로서 욕심에 의한 저 개인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이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위 논문은 동아시아의 부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이름 붙임으로써 이것이 교육에 대한 아이와 부모의 권리와 선택이 묶이는 상황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한국 부모든 싱가포르 부모든 아이의 교육에 대해 불안했던 이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제도와 구조의 모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교육 개혁의 과정에서 더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기에 그 소용돌이 속에 위치한 개인의 판단이 어느 때보다 어렵고 중요한 요소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분은 제쳐 두고 부모를 교육하고 계몽하면 아이는 자유로워질 것이고 타고난 능력을 살려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부모를 꾸짖던 부모 교육 담론이 그토록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한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 한다.
이 말에 공감하며 학부모가 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과거의 제가 너무 어리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모든 부모는 부모이자 학부모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모가 됐고, 아이가 입학하면서 학부모의 책임도 맡았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는 서서히 두 책임을 모두 맡아 살아갑니다.
논문을 읽고 난 후, 부모가 아이가 공부 잘하길 원하면 억압적이게 될 수 있다는 의구심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아이가 성장하는 것은 아이의 선택이자 부모의 민주적인 설득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확률도 매우 크다는 점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의 반대어는 독재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와 저의 아이의 일상에는 딜레마가 수없이 존재합니다. 단지 이제 딜레마의 시작점이 어딘지 알기 때문에 마음은 크게 불편하지 않은 점이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Bach D (2017) Battling the tiger mother: pre-school reform and conflicting norms of parenthood in Singapore. Children & Society 31(2): 134-143. Cheng K (2014) Does culture matter? Education reforms in East Asia. Revue internationale d’éducation de Sèvres. http://ries.revues.org/3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