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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임문화포럼 Dec 24. 2021

우리는 왜 괴물과 싸워야 할까?

  근래 들어 수많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한국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공통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괴물’이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자. 죽을 날짜와 시간을 예언 받은 사람 앞에 나타나 물리적인 폭력을 행하면서 지옥에서 겪을 괴로움을 미리 보여주는 3명의 ‘사자’는 사실 말이 ‘사자’이지 ‘괴물’에 가깝다. 외모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도 괴물스럽고 시연을 하는 과정 중에 그들이 행하는 폭력도 괴물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반면 46일이라고 하는 넷플릭스 최장 1위를 기록한 <오징어 게임>의 괴물은 어떠한가. 물론 이 드라마에는 <지옥>에서 찾을 수 있었던 그런 ‘괴물’, 즉 크리쳐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455명의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는가? 아니지. 오징어 게임을 주최한 프론트맨과 진행요원들, 그리고 VIP들까지 합친다면 괴물의 수는 500명을 훌쩍 넘는 것 같다. 모두가 인간이지만 어쩌면 <지옥>에 등장하는 괴물보다 더 괴물스럽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는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했던 드라마 <스위트홈>에서의 괴물은 또 어떤가? 이 드라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괴물로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놀랍게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괴물로 변해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괴물화는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괴물로 변하는 과정 중에도 어린 남매를 구해준다거나 자신이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다른 생존자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등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괴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그를 괴물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를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괴물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오징어게임>, <스위트홈>

  요즘 드라마들은 어쩌다가 이렇게도 많은 괴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유형의 괴물과 맞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동원한다. 어떻게든 괴물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디지털 게임이 떠오른다. 사실 괴물을 제일 많이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미디어는 바로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수많은 괴물들과 대적하고 때론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경험을 하면서 성장한다. 디지털 게임에 등장하는 괴물은 일차원적으로는 플레이어가 ‘겨냥하고, 쏘고, 도망치게 하는’ 게임 플레이를 유발하는 촉매제이다. 플레이어는 괴물을 향해 무력을 행사하고 괴물을 무찌르고 나면 성장이라는 결과를 보상받는다. 


  사실 촉매제로서의 괴물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특히 플레이어가 청소년일 경우에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기성세대로부터 게임은 폭력성을 가르치고 학습하게 하는 도구라며 근절해야 하는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걱정의 대부분은 게임의 괴물을 향한 폭력성 때문이다. 혹시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현실에서도 게임 플레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런 상관관계가 있다면 게임에 등장하는 베고, 썰고, 쏘는 모든 액션들과 괴물들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게임의 괴물들은 폭력성을 배가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 플레이어 내면에 잠재해있던 공포를 소멸시키고 억압받던 개인의 폭력성을 발현시켜 상쇄시키는 순기능을 수행한다. 마치 카타르시스처럼 말이다. 


  폭력을 행하는 것이 폭력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은 게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메커니즘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지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더불어 디지털 게임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괴물들이 게임에서 왜 필요한지, 플레이어가 ‘베고’, ‘썰고’, ‘쏘는’ 행위가 전혀 문제적이지 않은 이유를 밝혀보고자 한다. 


  괴물은 시대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괴물이 등장하는 미디어에 따라서도 그 재현 양상은 달라진다. 그럼에도 괴물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는데 형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정상적인 크기이고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괴물들의 거대함은 그들이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특징이다. 기이한 형상 또한 ‘혼성’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두 종류 이상의 동물들이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막연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막연함은 괴물을 마주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두렵고 무서운 상대로 인식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괴물들은 대부분 어둠의 시간을 상징한다. 어둠은 불길하고 두려운 대상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둠은 항상 부정적이고 혼돈이고 무엇인가를 숨길 수 있는 세상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니 두려움은 더 커진다. 그래서 괴물들 대부분은 검은색으로 표현된다. 


  두려움의 존재로서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괴물은 사실 나와는 다른 존재인 타자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다르다’라는 것은 나와 대상 간에 공통적인 성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바깥 영역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는 다른 대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기를 바란다. 일정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때 우리들은 안전함과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는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뜻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기 어려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차츰 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상대를 알아간다는 것은 둘 간의 차이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다름’이 사라진 대상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이른바 ‘나’의 영역에 ‘그’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와 ‘그’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특질로 묶인 전체가 된다.          

     

그림  게임 <몬스터 헌터월드>와 <리니지>에 등장하는 몬스터

  디지털 게임에서 괴물을 대하는 플레이어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플레이어는 처음 마주하는 괴물이 나와 너무나도 다르게 생겼음을 인지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는다. 괴물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상할 수도 없다. 나를 공격할지 아니면 그냥 지나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괴물은 더 두려운 존재가 된다. 특히나 만약 전투를 하게 된다면 그의 힘과 스킬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패배할 확률을 가정하게 된다.  그래서 일정 거리를 두고 그를 관찰하는 것이다. 플레이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관찰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일! 플레이어는 어떤 액션이든 취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괴물에게서 받는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거부감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피하거나 혹은 정복하거나이다. 


  첫째, 피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디지털 게임에서 괴물의 공포를 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포와 마주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괴물을 보면 즉시 도망치면 된다. 하지만 이 도망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 곳곳에는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괴물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로그아웃이다. 아예 게임 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괴물과 대적할 상황은 영영 사라진다. 


  둘째,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괴물과 적극적으로 맞서는 방법이 있다.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신화나 역사를 통해서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우라노스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생긴 괴물 자식들을 모두 지옥의 깊은 나락으로 보내버린다.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기형적인 자식이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인지 예측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탐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디지털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괴물로부터 발생하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사라져’ 혹은 ‘저리가’라고 외쳐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 플레이어는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휘두른다. 하지만 이 때 쓰는 폭력은 정당화된 폭력이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내가 그를 물리쳐야한다. 반면 현실에서의 무기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행동을 디지털 게임을 통해 수행해보는 것은 플레이어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대리 만족이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괴물을 물리치면 공포는 즉각적으로 사라진다. 공포의 소멸은 나의 생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의미는 일차원적인 가치이다. 괴물과의 대립, 전투, 그리고 소멸의 과정은 사실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활동이다. 플레이어는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사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랑자이다. 플레이어는 미지의 게임 세계를 탐험하면서 모험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깥세상은 늘 어둡고 잘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데 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바라보는 세상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많은 그래픽 정보를 소화해내지 못하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스크린이라는 사각 프레임을 통해서만 게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환경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시화되지 않은 세상을 향해 플레이어가 한 걸음 내디딜 때 처음 만나게 되는 존재가 바로 괴물 캐릭터이다. 플레이어가 괴물을 물리치게 되면 타자로서의 ‘다름’은 사라지고 괴물은 나에게 합일된다. ‘다름’이 사라진 세상은 더는 혼돈의 세상이 아니다. 미지의 세상은 이제 내가 잘 알고 있는, 내게 익숙한 그런 세상으로 다시 재편된다. 플레이어는 괴물이 서 있고 괴물이 활동했던 범위의 세상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게임에서 괴물과 대립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은 잔인하고 무차별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경험하는 측면에서 논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전투를 통한 폭력성만 보일지라도 그 내면에는 타자인 괴물을 소멸시키고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큰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임에서 괴물은 플레이어인 나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기재가 된다. 디지털 게임에서 괴물을 베고, 썰고, 쏘는 플레이는 불균형한 세상을 균형적인 세상으로 재편하는 동시에 플레이어에게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표출해 소멸시켜버리는 가치 있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면서 하루하루 성장해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동은

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 교수

2021년 게임문화포럼 투고분과 위원

2015년~현재, 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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