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물은 어떠한 방식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촉발해야 하나
*<옥씨부인전> 최신 방영 회차(3화) 시청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4.12.10)
거짓으로 신분을 속인 죄가 클까. 아니면 노비로 태어난 원죄가 더 클까. <옥씨부인전>은 양반가 자제 옥태영으로 신분을 속인 노비 구덕이(임지연)가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신분이 벼슬이던 조선시대. 양반은 고개를 들어 우러러야 할 하늘같은 존재요, 천민은 땅 아래로 고개를 조아려 양반을 섬겨야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어찌하여 신분제하에서 김낙수의 노비 구덕이는 옥필승의 장녀 옥태영인 양 위장할 수 있었을까?
사건은 구덕이가 김낙수 집안의 몸종이던 과거로 흘러간다. 졸부 김낙수 일가는 재산은 풍족하나 성품은 볼품없기로 파다하다. 김낙수의 여식, 김소혜 또한 머리가 나쁘고 흉포하다. 글에는 관심도 없을 뿐더러 식솔로 딸린 노비들을 학대하기 일수다. 김소혜의 종 구덕이는 글과 셈에 밝고 영민하나, 불운하게도 천민이라는 신분에 갇혀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급기야 김소혜는 자신과 혼담이 오가던 명문 송대감 댁의 맏아들 송서인과 구덕이가 정분을 나눈 것으로 오인하여 구덕이를 멍석말이한 채로 구타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김낙수의 수청을 들 것을 강요받는다. 구덕이가 김낙수를 살해하고 탈주하게 된 계기다.
차디찬 겨울 눈발을 헤치고 구덕이가 당도한 곳은 산 중턱의 주막이다. 함께 도망치다 구덕이에게 짐이 될 것을 염려하여 구덕이의 부친 개죽이는 하얀 눈길 사이로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구덕이는 부친을 기다린다는 연유로 1년여간 주막에 머무르는데, 이때 운명을 전복할 귀인, 청나라에서 온 옥태영을 조우한다. 천민을 괄시하던 김소혜와 달리 옥태영은 구덕이의 존엄성을 일깨운다. 주인에게 종속된 천한 존재가 아닌 동무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옥태영에게 구덕이는 생애 처음으로 인간다움을 인정받는다. 옥태영과 구덕이의 우정을 깊어가고, 만사가 형통하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도적 떼가 주막에 들이닥쳐 옥태영이 사망하고, 옥태영의 가락지를 낀 구덕이가 옥태영의 행세를 하게 되기 이전까지는.
상기한 서사가 1화 후반부-2화 초반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옥씨부인전>의 전개 속도는 과감하고 맹렬하다. 발단을 1, 2화에 전부 몰아넣고, 2화 후반부부터 백이의 죽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구덕이의 외지부로서의 성장 서사를 펼친다. 이항복의 <유연전>을 모티브로 한 <옥씨부인전>은 ‘왕자와 거지’ 설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을 바꿔입고 차림새를 달리하자, 사람들이 노비였던 구덕이를 양반가 자제로 인식한다는 설정에 비약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나, 신분 상승 이후 전개될 구덕이의 활약을 향한 기대감이 도입부의 얼개 사이 존재하는 빈틈을 견인한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서사를 따라 시청률도 1화 4.2%에서 2화 6.8%, 3화 7.8%로 증폭했다. 성공한 사극으로 분류되는 <옷소매 붉은 끝동>, <연인>의 동 회차 시청률보다도 높은 지표다. <옥씨부인전>의 시청률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옥씨부인전>이 시대물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1. ‘직업’으로 부여되는 여성 주인공의 주체성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범죄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 암행어사를 다룬 사극은 기존에도 존재한다. 김명민 배우가 ‘명탐정 김민’ 역을 맡은 <조선명탐정> 시리즈, 김명수 배우가 조선 왕실의 비밀 수사관을 연기한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이 대표적인 예다. <옥씨부인전>에서 죽은 옥태영, 그리고 구덕이가 지향하는 ‘외지부(;조선시대의 변호사)’ 역할을 드라마 <조선변호사>에서 우도환 배우가 연기한 바 있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이 중 사건을 추리, 해결하는 주체는 대대수 직업, 직함을 가진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시대에 여성은 신분에 따라 구별되었을 뿐, 기생, 궁녀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업’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최근 2-3년간 흥행했던 시대극을 살펴보자. <연인>의 경우 주인공 유길채(안은진)는 억척스러운 생활력으로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타개하며, 이장현을 상대로 주체적인 사랑을 펼친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궁녀 성덕임(이세영) 또한 국왕인 정조의 구애에도 ‘궁녀에게도 스스로의 의지가 있고, 마음이 있다’라며 왕의 은총을 받는 수동적 여성상이 아닌, 적극적 행위자로서 역할한다. 그러나 직업 선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덕임은 집안 사정에 의해 타의로 입궁한 궁녀이며, 길채는 낙향한 사대부 유교연의 첫째 딸일 뿐이다.
<밤에 피는 꽃>은 여성 주인공에게 ‘위장’이라는 장치를 부여하여 진일보한다. <밤에 피는 꽃> 주인공 여화(이하늬)는 밤마다 복면을 쓰고 담을 넘어 억울한 백성의 원한을 푸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 여화는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주체자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화 역시 낮에는 죽은 지아비를 위해 곡을 하거나, 삼강행실도를 필사하는 등, 타자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유교의 덕목을 따르는 수절과부를 연기해야 한다. 반면, <옥씨부인전>에서는 3화 노비 백이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고, 구덕이 스스로 ‘외지부’가 되기를 희망하며, 외지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타인에게 감추지 않는다. 현대극에서는 이미 커리어우먼으로 활약하는 여성 주인공이 트렌드가 된 지 오래다. <굿파트너>에서 차은경(장나라)이 스타 변호사로, <눈물의 여왕>에서는 홍해인(김지원)이 퀸즈 백화점의 사장으로 활약한다. 이제 시청자들은 현대극에서 직업인으로 활약하는 주체적 여성상만을 열망하지 않는다. 사극에서도 직업으로 부여된 명확하고 당당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상을 갈구하고, 열광한다.
2. 회빙환 대신 신분 상승
2년여 전부터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은 웹툰, 웹소설에 이어 콘텐츠 트렌드로 일약 급부상했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하거나, 타자에 빙의하거나,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 설정이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 자조하는 청년 세대의 절망은 현생을 리셋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판타지로 위로받는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순양그룹의 비서 진도준 윤현우(송중기)가 진양철 회장의 손자 진도준으로 환생하여 권력의 중심이 되고,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는 7년 차 취업준비생 최이재(서인국)이 취업에 실패하고, 투자 사기를 당한 사실에 좌절하여 목숨을 끊자 12명의 타자의 삶으로 환생한다. 혹은 <내 남편과 결혼해줘>처럼 단짝 친구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과거로 회귀하기도 한다. 이처럼 회빙환 서사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실수를 청산하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청자의 욕망을 대리한다.
<옥씨부인전>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므로 회빙환이라는 장치가 적용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난 몇 년간 회빙환 트렌드로 맛보았던 짜릿하고 극적인 도파민은 여전히 <옥씨부인전>에서도 유지된다. 1화에서 옥태영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비 옥태영을 동무이자 양녀로 받아들인다는 급작스러운 설정, 2화에서 옥씨 집안으로 돌아온 옥태영의 정체를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설정 등 우연이 남발하지만 ‘구덕이가 하루빨리 신분상승한 모습을 보고싶다’라는 욕망에 의해 도입부 개연성의 빈틈이 일말 상쇄된다.
3. 신분 상승으로 민초를 대변하다
<옥씨부인전>의 신분 상승은 ‘평등’,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이전의 신분상승 서사와 차별점을 지닌다. 여성 노비인 구덕이는 앞서 언급한 주체적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더해 ‘천민’으로 교차하는 정체성을 지닌다.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맹인 침술사 천경수(류준열)를, <왕의 남자>는 연산군이 집권하던 시대의 광대(이준기)를, <전,란>은 의병이 된 몸종 천영(강동원)을 내세워 사회적 약자, 천민으로 살아야 했을 수많은 이들의 설움을 대변한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폭군 앞에서 예술혼을 사르거나, 혼란한 시국에 정의를 실현한다. <옥씨부인전>의 구덕이는 개, 돼지,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받는 노비가 더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외지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양갓집 규수를 연기하고, 대부분의 여성이 직업의 갖지 않은 조선 사회에서 외지부가 되겠다는 구덕이의 선택은 단순 한 개인의 욕구 분출이라기보단, 구조적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천민 하선(이병헌)이 도승지 허균의 지시 아래래 광해군을 대리하여 통치한 사례와도 유사하나, 구덕이의 결정은 백이의 죽음을 토대로 외지부가 되겠다고 자발적인 결정을 내린 데 의의가 있다. 극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서민, 즉 민초이기에 부당한 신분제 사회를 개혁해보겠다는 구덕이의 선택은 전폭적으로 지지받는다. <품위있는 그녀>나 <안나>에서는 상류 사회로 진입하려는 박복자(김선아), 이유미(수지)의 위태로운 위장에 매료되었던 한편, 주인공들의 범법행위를 완벽히 지지할 수 없었던 점과도 차이가 있다.
매년마다, 시대마다 콘텐츠의 트렌드는 변화한다. 하지만 불변하는 트렌드가 있다면 콘텐츠는 매 순간 사회와 발맞추어 진보해야 한다는 사실 아닐까. 그것이 과거를 조명한 사극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해석을 발판으로 과거를 들여다보고 싶어하니 말이다.